유부녀의 스타벅스 캐나다 워홀 [6]
[6]
"죄송합니다..
다시 만들어드릴게요.."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해요"
미치겠다..
몇 번째 실수인지 모르겠다.
꾀꼬리처럼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진짜 미안해.."
같이 일하는 팀원들에게도
미안하다는 말만 몇 번째인지..
나 자신이 싫어도
너무 싫었다.
–
–
너무 곱게 자랐던 걸까?
한국에선 한 번도
식당, 카페 알바를 해본 적이 없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운 만큼
시급이 높은 알바 자리를 구했다.
학원알바, 과외알바, 도서관 알바 등
엉덩이 붙이고 머리 쓰는 알바만 했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몸을 움직이는
알바는 해본 적이 없었다.
곱게 자라진 못했지만
곱게 일한 것 같다.
일하다가도 몇 번을
울고 싶었다.
'커피..
니가 뭔데
나를 힘들게 해..'
–
–
캐나다 스타벅스 메뉴는
한국보다 많았다.
캐나다 스타벅스 커스텀은
한국보다 다양했다.
캐나다 스타벅스 정책은
한국과는 달랐다.
그냥 ‘스타벅스’라는 이름
넉자 빼고는
한국과는 다 달랐다.
음료 한 잔을 만들더라도
매 순간 실수였다.
"꿈뀨, 음료 그만 만들고
가서 주문받아...."
슈퍼바이저들은
보다 못해 주문받는 곳으로
내 포지션을 옮기기 일쑤였다.
바보가 된 것 같았다.
–
–
캐나다 스타벅스에는
세 가지 업무 분담이 있다.
주문받는 역할,
음료 만드는 역할,
서포트해주는 역할.
출근하면
슈퍼바이저가
각 업무를 분담해 주는데,
보통 신입은 주문받는 역할에
많이 배정받는다.
주문받다 보면
메뉴가 뭐가 있는지
어떤 메뉴가 주로 잘 나가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손이 느려도 할 수 있어
난이도가 다른 역할보단 쉽다.
하지만 나에게는
주문받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이민자의 도시 캐나다에서
가지각색의 억양을
알아듣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인도 억양, 중동 억양, 프랑스 억양, 중국 억양...
수능 영어, 토스, 토익, 오픽 등
많은 영어 듣기 시험을 치고,
미드, 영드, 할리우드 영화를
그렇게 많이 봤지만,
들어보지도 못한 그 억양들..
그런 억양 앞에
내 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문을 잘못 받을 때도 있었고,
말을 못 알아들어서
재차 다시 물어봐야 했다.
이런 나를
답답하다는 듯 바라보는 손님도 있었고,
짜증 난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는 손님도 있었고,
조용히 기다려주는 손님도 있었다.
–
–
어김없이
주문을 받고 있었던 날이었다.
우락부락한 몸과
험상궂게 생긴
파란 눈의 중년 남성이
주문하러 내 앞에 섰다.
그리곤 딱 한 마디를 남겼다.
"볼드 커피."
....?
블랙커피, 아메리카노
다 들어봤어도,
볼드 커피는 들어보질 못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곧바로 찌푸려지는 인상.
그 남자가 다시 말했다.
"볼드 커피"
메뉴판 그 어디에도
볼드 커피는 없었다.
내가 잘못들은 걸까..?
"다시 한번 말씀 부탁드려요. 죄송합니다.."
중년 남성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면서
기가 막힌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서투른 나를
답답해하는 손님도 많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적대적인 손님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근처에 있던 이사벨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이사벨이 다가오더니
내 옆에 섰다.
"안녕하세요, 로버트! 뭐 드릴까요?"
이사벨이 중년 남성에게 물었다.
로버트가 무언가 중얼중얼 시작했고
이사벨이 주문을 포스기에 찍었다.
이사벨이 주문을 받는 와중에도
난 로버트가 무엇을 주문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내 좌절감을 읽었는지
이사벨이 다독여줬다.
"괜찮아, 저 손님 단골인데
본인이 매번 시키는 메뉴 모른다고 심술부리는 거야."
하지만 로버트에게서 나온
적대감과 짜증은
나의 자괴감을 한 껏 끌어올렸다.
나중에서야
'볼드 커피'가
'다크로스팅'한 커피란 걸 알게 되었다.
커피 알바 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메뉴판에 있는 '다크로스팅 커피'가
볼드커피로 불린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 날 만큼은
집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유일한 날로 기억된다.
—
—
스타벅스에 출근하면
주로 주문받는 포지션에 배치됐다.
가끔가다
음료 만드는 포지션에
배치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실수해서
다시 주문받는 곳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못하는데...
만들다 실수했던 음료들은
기억해 뒀다가
퇴근할 때 직접 시켜 먹어보고
그 주문 스티커들을 모았다.
모은 스티커들은
연습장에 붙여서
레시피가 어떻게 되는지,
내가 어떤 과정을 빼고 만들었는지
오늘 했던 실수들을 다시 회고했다.
일을 몸에 익히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
그저 하루하루 복습하면서
실력이 하루빨리 늘기 바랐다.
하지만
머리가 그렇게 좋지 않아서
1달, 2달이 지나도
실력은 늘지 않았다.
—
—
2달이 지나도록
근무시간의 거의 대부분은
주문받는 포지션에 배치됐다.
주문받는 포지션이
싫은 게 아니었다.
스타벅스에 역할이 3개가 있는데도
계속 실수하고, 손이 느리다 보니
주문받는 역할만 주로 맡을 수밖에 없다는
그 자괴감이 참 싫었다.
일 못하는 내가 한심해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바보 같아서..
할 수 있는 건
못 알아 들어도
최대한 활짝 웃으며
주문받는 것뿐이었다.
—
—
한 중년 여성분이
스타벅스로 들어왔다.
평소와 같이
활짝 웃으며 주문을 받았다.
"Hi, How are you?"
여성 분은
특별할 거 없이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커피 한 잔을 내어드렸다.
다행이다.
이번엔 실수 없이 잘 처리했다.
몇 분 있다가
여성 분이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Can I get some sugar?"
스몰톡을 할 수 있는 실력은
아직 되지 않았다.
구사할 수 있는 문장은
오직 단답형.
"Of course! No problem!"
그저 기본적인 영어 문장으로
웃으며 설탕을 건네드렸다.
한 참 뒤
그 중년 여성분이
다시 주문하는 줄에 섰다.
이번에는 주문하는 줄이 길어서
그분이 내게 닿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Hello, again!"
이번에도
심플한 문장으로
다시 맞이했다.
여성 분이 씨익 웃더니
입을 뗐다.
"You are very nice
Thank you so much"
....?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여성 분은 이 말을 남긴 채
웃으며 가게를 나갔다.
그 말 하나 해주려고
그 긴 줄을 기다렸던 거였나..
그 순간,
그 모든 순간이 감사했다.
—
—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도,
반대로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한다는
그 사실을 그동안 외면했던 것 같다.
일이 몸에 익히기까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면
굳이 자괴감에 사로 잡힐 필요가 있었을까?
학연, 지연, 혈연 하나 없는
낯선 곳에 홀로 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이곳.
이 새로운 곳에서
오직 내 힘으로, 내 의지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흘러가는 시간 동안
차근차근 발전해 가면 되는 거 아닐까?
이미 2달이 흘러간 지금,
남은 워홀 기간은 단 10개월.
'여기서 일한 기회는 내가 잡은 거야.
워홀 기간도 오직 10개월 남은 지금.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즐겨야지.'
그리고 그날부터
근무가 끝나고
매장에 남기 시작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