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여행을 갔다. 흐르지 못하고 오래 고여있는 게 싫어서 떠나겠다고 마음을 먹은 거였는데, 타지에 와서 까지 그 마음이 좀처럼 고쳐지지가 않았다. 매일매일 대합실에 갔다. 경유하는 역이 가장 많은 기차를 골라 탔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내려서 이름도 모르는 마을을 산책하다가 도로 오길 반복했다.
눈은 엄청 쌓였다. 다른 무엇보다 삽 하나를 챙겨놓는 일이 제일 든든할 것 같이. 통 내리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으나, 쌓이기는 잔뜩 볕을 받은 잡초처럼 순식간이었다. 며칠 동안, 기차에 앉아 보이는 거라곤 오직 눈뿐이었다. 덮이고 덮여 실체가 불분명해질 정도로, 흰 눈은 눈에 잡히는 모든 자락을 단단히 쥐고 놓질 않으려는 듯했다. 한 동안,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시간을 먹으면, 으레 볼품없어지고 시들해지기 마련이므로, 그 산책 법도 슬슬 지루해질 무렵이 되었다. 나는 좀 더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훤히 젖혀 거세게 휘저어 놓고는 아무런 책임 없이 방치해두고 달아날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를 꼼꼼히 꿰매고 오면 떠나더라도 나의 무엇이 그들에게 수시로 말을 붙일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면, 여행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 떠도는 상태로 사는 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일기가 적히는 기분. 그건 분명 고이지 않고, 흐르는 일이었다.
그 날, 돌아와 나는 근처 마트에 가서 몇 가지 먹을거리들을 골라 담기 시작했다. 꼭 한 입에 털어 넣을 수 있는 음식이라야 했다. 조막한 주전부리를 외투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누군갈 만나면 대단한 명함처럼 건네줄 작정이었다. 비록 주고받는 게 말이 아니더라도, 사람 간의 인력만으로 반드시 교감은 이뤄지리라는 믿음이었다. 나는 계획대로 초콜릿이나 캐러멜 같은 것들을 두둑이 채워두고 역으로 나갔다.
눈은 더 쌓였다. 사람들은 외투를 목 바로 밑면까지 잠갔고, 조금의 찬 기운이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들 각자의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 추위를 벗기고 있었다. 손끝을 소매 안쪽까지 담그거나 팔 전체를 뻗어 몸에 걸쳐 두르기도 했다. 기차에 앉아 온통 보이는 것이라곤 눈뿐이어서, 나는 눈이 취하는 모습만을 믿고 내렸다.
언 강가에 두 아이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나는 주머니에서 초콜릿과 캐러멜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그 둘은 서로의 이름을 번갈아 불러가며, 눈으로 무슨 형상을 만들지 고민하는 듯했다. 비록 이국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단어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고, 그 말을 줍듯 고개를 그쪽으로 가져갔다면 그것은 분명 이름을 부른 게 맞을 거였다.
한 아이가 자신이 던져 놓은 장갑을 주우러 가자, 다른 아이는 그 아이의 이름을 다시 한번 크게 불렀다. 하얀 눈을 긁다가도 이름을 불렀고, 무언가에 열심히면 그게 무어냐고 궁금한 듯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그 두 아이가 번갈아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보자니, 적당히 웃기 좋을 만큼 마음이 열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열기라면, 누구든지 기꺼이 받아들일 정도로, 빳빳하게 굳어 있던 내 심장에 보들보들 보풀이 일 것도 같았다. 나는 두 아이보다 더 철없는 어리광을 피울 마음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오래 딴짓을 피워가며 주위를 한참 서성였다. 주머니에 쥐고 있던 초콜릿과 캐러멜이 손의 열기에 녹아 문드러질 지경이었다. 그것들을 얼른 들어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다급히 부르며,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였다. 나는 재빨리 꺼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선 오히려 그런 행동이 더 위험해 보였을까, 두 아이는 조금씩 걸음을 뒤로 물리더니 내 행동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 그만 몸이 굳고 말았다. 두 아이에게 눈으로만 말을 거는 시늉을 좀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자리의 눈들을 털고 앉아 멍하니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무려나 아이들은 계속 눈을 치덕거렸다.
해가 스멀스멀 지기 시작해 사방이 검게 그을리고서야 아이들은 떠났다. 그 자리엔 눈사람 비슷한 형상의 눈덩이가 성글게 뭉쳐 있었다. 그것은 하루도 채 건사하지 못할 정도로 연약해 보였다. 기온이 아니라 바람 따위에 더 기민하게 반응할 것 같이. 그리고 나는 그 모든 풍경을 등으로 받으며 숙소에 돌아왔다.
나는 며칠을 머물면서 그동안 안 해본 일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내 이름이 누군가에게 불려본 일이었다. 멀고 멀어져 그 거리가, 시간의 두께가 점차 굵어질수록. 자신 스스로와 대면한 시간이 많을수록, 그건 거의 한 사람의 맥을 짚는 정도의 말이 되어 버려서 그런 것 같다.
누군가의 이름이 입 안 가득히 고이기 시작했다면, 분명 무엇이 시작되었다는 뜻이고, 어떤 경계를 넘어왔다는 뜻이다. 어떤 식으로든지 이름이 많이 불린 이는 갖가지 방식으로 내 삶에 침범하는 것이겠고, 그래서 말의 온도가 조금 높을 것이겠다. 꼭 이름이 아니어도 좋다. 그런 사람은 보통 이름이 아닌, 비슷한 무언가로 불려지는 날이 많을 것이니까. 많이 불리어서, 이름의 마디마다 음들이 넘쳐 조금은 어지럽다고 해도 괜찮다. 그럴수록 그 사람은 필시 내가 죽도록 사랑할 사람에 가까워질 테니까. 그건 '당신의 이름 사이엔 무수히 많은 계이름이 산다.'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