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 나는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의욕도 기대도 많이 심드렁해진 상태에서였다. 예전엔 이 시기가 다시금 체험해 볼 수도, 복원될 수도 없는 애틋한 과거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저 놀랄 일도, 특별할 것도 없는 한 시절의 '일부'로 여겨질 따름이었다. 친구들은 방학 기간 내 뭔갈 많이 계획하고 이뤄놓은 모양이었다. 각종 자격증 정보를 공유하거나, 태연하게 어학 점수를 공개하고 그걸 서로 의식하느라 바빴다. 나는 그들이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상태에서 비롯된 묘한 긴장감과 열패감을 느꼈다. 나 역시 그간 게을렀던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문법대로라면 지나치게 나태했던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바쁨'의 의미가 나와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친구 중 하나는 내가 통 말이 없자 '뭘 했냐'며 검증하듯 물어왔다. 나는 가게를 보느라 시간을 거진 다 보냈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친구는 '그래도 집안일을 도울 수 있어 다행'이지 않냐며, 자신은 '온종일 집에만 있어 눈치가 보였다.'는 위로랄지, 푸념일지 모를 말을 늘어놨다. 그러면서도 그 친구는 무리 중 어학 점수가 제일 높았다. 친구들의 체계적이고, 주도적인 대화는 얼마간 더 이어졌다. 나는 그 대화에 계속 겉돌았지만, 그래도 귀를 열고 뭐라도 좀 들어보려 기를 썼다.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엇을 이해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고, 때문에 나도 언제든지 실행할 준비가 되었다는 근거 없는 자신이 생겼다. 그렇게 한참을 집중해 듣고 있는데, 몸 어디께서 약한 진동이 느껴지는 걸 감지했다.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휴대전화 진동음이었다. 부재 전화만 다섯 통에, 이제 막 '전화 좀 달라'는 내용의 문자가 도착한 참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날아온 메시지였다. 나는 무슨 큰일이 났나 싶어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전화를 받자마자 내 이름을 부르며, '지금 어디냐'고 했다. 나는 대답 대신, '왜 그러느냐.'고 상황을 먼저 물었다.
"이게 이상하네."
나는 속이 답답해 추궁하듯 캐물었다.
"왜 뭐가?"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곤, 다시 또 '이상하다'는 말을 되풀 뿐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왜 그래."
그렇게 한참을 뜸 들이다, 아버지는 늘어진 목소리로 '가게에 음악이 안나온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괜히 힘이 빠졌다. 나는 그럴 리 없다고.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보라 일렀다. 아버지는 또다시 말이 없다, 이내 '소용없다'며 넌더리를 냈다.
"그럼, 컴퓨터를 껐다 다시 켜 봐."
아버지는 그 단순한 요구가 아주 난감했던지, '그러지 말고, 네가 와서 좀 해주고 가라'는 말을 양해도, 부탁도 아닌 투로 담담히 꺼냈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내가 저번에 알려줬잖아."
아버지는 내 말을 단숨에 잘랐다.
"그러지 말고 잠깐만 들렀다 가라. 말해도 모른다."
"아니, 모르면 배워야지. 그리고 내가 저번에 알려주니까, 알겠다고 했잖아. 다시 해봐, 화면에.."
수화기 너머로 덜컥 문 열리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그새 손님이라도 온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이내 '들렀다 가라'며 용건만 짧게 얘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를 다시 걸으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시간적 여유가 있음에도, '수업이 있어서, 못 갈 것 같다.'는 문자를 혼내듯 남겼다. 나는 아버지의 요구가 그 상황에. 더구나 그렇게 시시한 내용을 담고 도착한 데에 못마땅함을 느끼고 있었다. 뻔히, 아버지가 그러한 정황을 알 리 없다고 해도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업 내내, 핸드폰은 조용히 몸을 떨어가며 신호를 보냈다. 나는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면, 사각 화면 안에서 아버지는 화를 내기도, 어르고 미안쩍은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문자는 요구에서 부탁으로, 점차 호소가 짙은 말들로 바뀌어갔다. '왜 답을 안 하니.', '와라', '잠깐만 들러줘라.', '뭐하니?' '많이 바쁘니.', '급한데, 와주면 좋겠다.', '미안하다, 부탁 좀 한다.' 내 짜증은 점점 수그러들고, 연민 비슷한 감정에 도달했다. 그렇게 감정이 점점 희석되어 물러질 동안에도 나는 끝내 답장 한 번을 보내지 않았다. 초심을 다잡듯 좀 전의 일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정말,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자제력이었다. 지금 당장에 느끼는 불편함을 마치 내 것이 아닌 양 외면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 아버지는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가게에 들렸을 땐, 수업을 마치고도 한참이 지난 늦저녁이었다. 학기 초에는 유독 행사나 모임. 이런저런 형식적인 활동이 많았고, 그런 자리마다 아쉬운 소리를 들어가며 일일이 불참 의사를 표하느라 시간이 지체된 거였다. 아버지는 비록 굼뜨지만 열의 있는 자세로 가게 안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순서에 의한 짜임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눈에 들어오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처리했다. 손님 하나가 카운터에서 아버지를 부르는데도, 아버지는 양해를 부탁하는 말 한마디 없이 이전에 하던 일을 마친 후에야 끝내 반응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문자처럼, 불시착한 사람처럼 낯설어 보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조금 미안했다.
가게에 들어서자,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어서 오시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소리쳤다. 가게에 별다른 소리가 없어서 그런가, 그 말이 허공을 오래 맴돌았다. 나는 곧장 주방에 들어가 밀린 설거지를 도왔다. 아버지는 그제야 나를 알아본 후, '왜 이제 왔느냐'고 타박하듯 물어왔다.
"일이 있어서."
"그래도 그렇지, 전화는 또 왜 안 받고."
그러곤 아버지는 더 이상 자세히 물으려 하지 않았다. 어떤 책임이나 도리, 의무 같은 것을 거들며 내게 역할 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물론 아버지의 잘못도 아니었다. 책임이 부재한 것도, 의무를 저버린 것도, 도리를 지키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이 모든 상황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상황은 대상이 될 수 없으니까. 탓하려 해도, 자신과 무관한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테니까. 그러면 그것은 내 핑계처럼 비춰질지 모르니까. 원망하기 위해선, 내게 빚을 진 대상의 구체적인 증거들이 필요했다. 내게 느끼는 미안쩍은 감정과 소극적인 태도, 어설픈 농담 같은 것들이.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에게 그런 증거들을 수집하려 했던 것이었다.
나는 얼른 일에 순서를 정하고, 아버지에게 역할을 부여한 후 일을 지시했다. 처음, 가게에 손님이 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는데, 벌써 세 테이블이나 손님이 차 있었다. 그래도 개강 초라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적은 수였다. 일은 반복적이고 차츰 익어 능숙해졌다. 이전만큼 일을 하며 느꼈던 초조나 혼잡함도 덜 했다. 없던 여유가 생겼다. 딱히, 좋은 증상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는 나대로 그 유유함에서 몹시 불길한 앞날을 내다봤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결과로, 그 끔찍함을 경계하고 애써 부정하는 마음을 갖고서. 아버지는 시간이 빌 때마다 밖을 나섰다. 주변 가게들 사정 좀 살필 겸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였다. 담배 연기는 아버지의 초췌한 몰골처럼 뭉그러져 흘러나왔다. 어디론가 계속해서 이동하는 무리 중, 가만히 서서 담배를 문 아버지는 마치 세상을 등진 사람처럼 애처로워 보였다. 아마도, 아버지는 '이대로 안 된다'는 생각을 또 하고 있을지 몰랐다. 물론, 나도 드는 생각이었다. '시간을 늘리는 것' 따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걸 알고 있을 터였다. 가게엔 이따금씩 사람이 들긴 했으나 금방 발길이 끊겼다. 아버지는 자주 담배를 태웠고, 종종 화장실에 소변을 누러 가기도 했다. 거하게 취한 취객들이 걸음을 멈춰 진귀한 동물 보듯 실내를 구경하다 사라졌다. 나는 전혀 개의치 않다는 얼굴로 예의 있게 묵례를 건넸다. 밤은 검고, 사람들은 그만 잊고 싶다는 듯 술을 마셔댔다. 얼마 후, 화장실에 다녀온 아버지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것 좀 봐라."
아버지의 손에는 검게 때가 타 지저분해진 스티커가 들려 있었다. 스티커에는 금연, 과태료 10만 원이란 문구와 함께, 조그마한 글씨로 '각종 광고판 및 간판 맞춤 제작'이라 쓰여 있었다. 아버지가 새롭게 발견한 대안책이었다.
"어떠냐."
나는 시도는 해볼 만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확실히, 이전 방법보다 나을 성싶었다. 그건 '시간을 늘리는 일'처럼 터무니없어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빼곡히 어깨를 맞대고 있는 거리에선 오히려 티가 더욱 잘 날 것도 같았다. 좌중에 누군가 번쩍 치켜든 손처럼 말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럼 어떤 것으로 하는 게 좋겠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일단 견적을 확인해 본 후 정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스티커에 적힌 번호를 한 자 한 자 읊어가며 차례로 누르기 시작했다. 수화기에서 희미한 연결음이 들렸다. 곧 저쪽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와 상호를 건넸다. 아버지는 광고를 보고 연락드렸다며 입을 뗐다. 긴 대화가 오갔다. 몇 번의 수긍과 위안, 고백과 주저가 말속에 뒤섞였다. 고개를 끄덕이다 한숨을 내쉬고, 표정이 점차 굳어지더니 이내 펴졌다. 아버지는 상담자의 말에 이런저런 동요가 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격은 얼마 정도 됩니까?"
.....
나는 이후로도 수업을 마치고 가게 일을 도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누군가 그려놓은 미래, 그 기획력에 내심 질투가 날 때면 심경이 복잡해졌다가도, 금세 자포자기를 가장한 낙관으로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그러나 그 진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냥,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알 수 없는 부채감에 휩싸였다. 그건 마치 숨을 계속 의식하여 호흡하는 일 같았다. 이제껏 인식해본 적 없는 것에 일일이 감각하고 반응하는. 나는 어떤 궤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고, 얼굴이 차츰 지워져 결국 사라지는 중 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화장실에 들러 볼일을 봤다. '제지'의 시늉을 보이거나 실없는 농담도 건네고, 흉한 얼굴로 거리를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그간, 가게 앞엔 아버지가 이전에 주문했던 입간판과 더불어 에어간판 두 대와 배너 거치대 한 대가 더 늘었다. 가게에 손님이 늘지 않자, 추가 제작한 것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그나마 하던 일을 계속한 결과였다. 정면의 창이 거진 다 가릴 정도여서, 이제는 가게 안을 슬쩍 훔쳐보는 사람도 잘 없었다. 자연스레 미소를 짓는 일도 줄었다. 우리가 고심해 뻗은 손에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가게를 개시한 지도 다섯 달이 다 되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직도 어떤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종일 초조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젊다는 이유로 '어쩌면 좋을 거 같냐'며 해답을 요구한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답하지 않고, 생각해보겠다며 어물쩍 넘겼다. 한데 오늘, 아버지가 좀 이상했다. 평소처럼 담배를 피우고 볼일을 본 후, 돌아와선 통 말이 없는 거였다. 나는 아버지가 무언갈 발견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따금씩 확인하듯 주기적으로 밖을 나설 리가 없었다. 더구나 무기력하고 불길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말이다. 아버지가 가까스로 입을 연 것은 가게에 네 번째쯤 돌아온 후였다.
"요 앞 사거리쯤에 가게가 새로 들어오려는가 보더라."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창가 속 먼 지점 하나를 가리켰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슬쩍 눈에 들어왔다. 꼭 실제로 바라거나 기대 중인 사람이라도 있는 것마냥. 호들갑스럽게 봐달라 손들지 않고, 묵묵히 자리에서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자세로. 가게는 복고를 컨셉으로 한창 유행 중인 프랜차이즈 포차인 듯했다. 현수막에 혀를 쭉 내밀어 입맛을 다시는 불량스러운 캐릭터가 인쇄된 걸로 봐선 분명했다. 스낵 포장지에서 흔히 볼 법한 익살스러운 그림체였다. 아버지는 '안 그래도 없는 손님 죄다 뺏기겠다'며 걱정스러운 소릴 했다. 나는 '그래도 가게 터가 좋은 자리는 아니라, 다행일지 모른다'고. 불행 중 근거 없는 다행을 겨우 찾아 손에 쥐여주려 노력했다. 하나 아버지는 한사코 말이 없었다.
나는 한 차례 손님이 빠진 틈을 타 그 근처 일대를 돌아다녔다. 진행 경과를 엿보기 위해서였다. 공사는 1층과 2층, 두 곳에서 동시에 이뤄지고 있었다. 2층은 원래 미용실이 있던 곳이었는데, 급히 자리를 정리하곤 사라졌다. 주방을 제외한 내부 전체를 철거 중이었다. 벽면 사방을 뜯어 헐고 있는 걸로 보아 시일이 꽤 걸릴 듯했다. 합판을 덧대 깐 마루를 떼어내자 부패된 폐목재에서 습한 냄새가 밀려왔다. 사방에 목분이 일었다. 사람들은 현장 가림막에 적힌 상호를 보곤 구면인 듯 지나쳤다. 고개를 들이밀며, 관찰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얼핏 업주로 보이는 사람이 슬쩍 모습을 비췄다. 한 손에 휴대전화를 든 채였다. 나이는 삼십 대 중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데, 그리 흔한 상은 아니었다. 헌데도, 어디서 많이 본 것 마냥 낯이 익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는 지시를 하는 건지, 따지는 건지 통화를 하다 이따금씩 크게 언성을 높였다. 말도 빠른 편이라, 날카롭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그의 모습을 뚜렷이 잡기 위해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는 누군가 자신 쪽으로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감지했는지, 나를 경계하듯 슬쩍 건너봤다. 나는 조금 긴장했다. 하나, 그는 내 외형을 한 번 훑고는 이내 통화에 집중했다. 나는 그가 나를 잊었거나 알아보지 못한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지만, 그러기엔 내 감각이 자꾸만 그를 알은체하려 들었다. 발이 쉽게 떼 지질 않았다. 나는 내 모호함에 확신이 들도록 걸음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그제야, 그의 체형도 눈에 확 들어왔다. 키가 크진 않으나 살집이 있어 몸체가 거대해 보였다. 나는 그가 나를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선을 교환하려 애썼다. 그의 의식 어딘가에서 내가 마중 나왔으면 싶었다. 하나, 그는 더 이상 내 쪽으로 눈길을 트지 않았다. 대신, '시발'하고 짧은 욕설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때,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버지였다. '어디 있냐.'는 문자 메시지가 화면 위로 절박하게 떠 올랐다. 큰일은 아니겠지만, 아버지가 해결할 순 없는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아직 저물 리 없는, 한창인 밤.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서둘러 가게로 돌아왔다. 누군가 걸려 넘어졌는지, 입간판이 바닥에 내동댕이쳐 있었다. 에어간판은 '위이이잉' 바람 소리를 내며 바쁘게 돌아갔다. 그 사이로, 아버지의 모습이 힐끗 보였다. 아버지는 당황한 듯 굳은 채 서 있었다. 손님 하나가 다가와 뭘 물으려는 와중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말없이 모니터만 바라봤다. '기다려 달라'는 뜻으로, 손바닥을 펴 제지의 손짓을 내보이면서 말이다. 손님은 그 대답이 몹시 불쾌했던지 그대로 밖을 나가버렸다. 문틈으론 더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 바람을 비집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슬쩍 나를 쳐다보곤 '와서 이것 좀 보라'며 손을 휘저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희미하게 '이상하다'고, '왜 이런지 모르겠다'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