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첫 책을 냈던 날은 2017년, 여름이었다. 수없이 읽어온 글임에도 굳이 합정동 교보문고까지 가 신간 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책을 한참 동안 바라본 기억이 난다. 지켜보는 내내 버겁도록 좋으면서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속에 술렁였던. 그 감각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서점 구석에서 책을 거진 다 읽고 나면 나는 다시 먼 길을 돌아왔다. 피곤한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이러한 일을 보름쯤 반복했던 것 같다. 이 주 가량이 지나고 나자 슬슬 정체 모를 불안감이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상황을 점차 현실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대로 책이 안 팔리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루하루가 초조하게 흘러갔다. 그 불안감이 유독 큰 날이면, 나는 서점에서 읽고 있던 내 책을 사 집으로 돌아왔다. 출판사에서 넉넉하게 보내준 책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러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욕구만큼, 누군가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도 커져갔다. 나는 안 되겠다 싶어 원고를 집필했던 장소와 첫 계약을 하던 카페, 내가 사랑하는 시인이 자주 들른다는 서점과 그 밖의 몇몇 곳들을 돌아다니며 책을 선물했다. 무더운 여름이었는데, 가방에 서너 권의 책을 넣고 다니며 정말 열심히 뿌리고 다녔다. 첫 책을 계약했던 카페에 가서는 예쁘게 포장된 분홍색 성냥을 사 왔고, 시인이 자주 들른다는 서점에선 책과 함께 포슬포슬한 빵 하나를 드렸다. 그 외에도 손편지며, 책갈피며 하는 것들을 정성스럽게 담아 건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서점에 들렀고, 이따금 내 책을 샀으며, 집에 와서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반복적이고, 빤한 일들로 며칠이 정신없게 지나갔다. 어찌 됐든 감사하게도 나는 여러 곳에서 많은 연락을 받았다. 대개 글을 잘 보았다는 서문을 시작으로 원고를 청탁하는 내용의 메일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부탁의 말끝에는 항상 '고료는 지급해드릴 수 없다.'는 말이 관용적인 안부처럼 늘 붙어있었다. 몇몇 요청은 수락했고, 또 어느 부탁은 거절했다. 글을 쓰면서도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내 노동의 가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무언가 부당하고 무례하다고 느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매번 별수 없다는 식으로 글을 적어 내려갔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는 없어 보였다.
결국, 나는 여러 과정을 거쳐 에디터가 됐다. 꼬박꼬박 월급이 나왔지만, 이상하게 형편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았다. 시간적 여유든, 금전적 넉넉함이든 간에 어떠한 부추김에 시달려 살아가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에디터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이다. 원고 작성은 물론, 스케줄 관리며 현장 취재, 인터뷰, 촬영 기획 등. 까닭에 나는 매번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임계치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취재 스케줄이 바쁘게 돌아갈 적이면 더 그랬다. 강원도 해상 가두리 양식장에서 드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취재를 하고 돌아와 유명 인플루언서와의 인터뷰를 진행할 때, 나는 이곳이 어딘지,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외로웠다. 외부 취재차 홀로 하룻밤을 보내는 날에는 원인 모를 허탈함과 외로움이 방안 가득 들어찼다. 방은 늘 불탄 것처럼 검고 어두웠다. 마치 오랫동안 방치된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녁은 한 겨울밤처럼 지루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불면에 시달렸다. 잠자리에 들며 TV를 켜놓는 버릇도 그즈음 생겼다. 사람이 만들어낸 소리가, 시시하고도 소란스런 소음이 왠지 모를 위로가 됐다. 듣다 보면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그렇다 해도 그 순간이, 기분이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는 글을 쓰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사람인데, 내게 할당된 시간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나는 매번 비슷한 내용의 원고를 다른 말로 바꾸어 쓰기 시작했다. 습관대로 적고, 시간이 되는 한에서 문장을 고쳤다. 습관이 굳어지자 글을 쓰는 감각 또한 조금씩 무뎌졌다. 나는 내 글을 쓸 때조차 손에 익은 문장을 빌려와 쉽게 써 버릇했다. 내가 어디선가 적었던 문장들로 내 글을 채워 넣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선배 에디터에게 이러한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그 선배는 시인이었다. 시인은 말을 빚는 사람이니까. 말의 안감을 만지고, 말을 만들어내느라 낱말과 낱말 사이에서 종종 길을 잃기도 하는 사람이니까. 선배는 내게 아주 간명하고도 확실한 대답을 내놓았다. 회사를 그만둬야지. 지금, 그 선배는 회사에 없다.
선배는 회사를 떠나며 내게 작은 노트 한 권을 선물했다. 그녀는 그 노트엔 절대 다른 글은 쓰지 말라고, 네가 쓰고 싶은 말들만 적으라고 강요하듯 말했다. 노트는 여전히 밀봉된 채 덩그러니 놓여있다. 벌써 두 달이나 지난 일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이따금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바짝 마른 합판에 못질을 하려면 비가 내려야 갈라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당연한 얘기지만 나와는 무관해서 쉽게 간과하게 되는, 그런 경험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세상의 한 쪽 면에 치우쳐 살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일까, 한 어르신이 제대로 살려면 바다에 나가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내심 놀란 눈치였다. 왜요, 어르신. 그는 사람도 엄연히 동물인데, 자연의 주기에 맞추어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일리가 있는 말 같아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게 대뜸 밥을 권했다. 일정이 바쁘게 진행되던 차라 힘들 것 같다고 정중히 말씀드렸다. 그는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서운한 모양인지 한사코 같은 말을 되풀었다. 그렇지, 바쁘겠지. 밥 먹을 시간이 어딨겠어. 그래도, 좀 한 술이라도 뜨고 가면 얼마나 좋아. 그에 대고 나는 그저 멋쩍게 웃기만 했다.
이상하게 어딜 가건 사람들은 내게 밥을 권할 적이 많았다. 나는 함께 식사를 한다는 건 어떤 관계를 증명하는 편이라고 믿는 사람인데, 다들 아무렇지 않게 끼니를 권하고 대접하길 좋아했다. 취재 동안 길어 올린 해산물을 한 보따리 쟁여 주시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 날이면 취재를 마치고 올라가는 내내 바닷내가 차 안 가득 넘쳐흘렀다. 덩달아 고생하셨다며 잡아 쥐었을 때의 거친 손, 붉게 충혈된 그의 눈, 퍼덕이며 몸부림치는 생선, 깊고 컴컴한 수심, 짜고 찬 바람, 그 계절의 농도 같은 것들도 피로한 기운과 얽혀 희미하게 아른댔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가 멀리 떠나왔음을, 한쪽 세계에서 그 반대편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톨게이트를 지나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에서 괜한 안도감을 느꼈다. 대책 없이 눈부신 도심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큰 위안이 됐다.
나는 여전히 내 일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오늘 아침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는 인터뷰이의 연락을 받는 꿈과 취재차 묵을 장소를 고르며 생각하는 그날의 밤. 나의 자주 허는 입, 내가 먹는 약, 내가 나약한 건 아닐까 하는 자조 어린 자책과 당장에 필요한 월급, 하루하루 변명하듯 살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고백을 주저하며 살아가기도 싫었던 나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 잘 모르겠다. 이러한 질문은 매번 먼 반환점을 돌아 나를 다시 처음으로 데려다 놓을 뿐, 별 다른 해답이 떠오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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