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음 Dec 31. 2020

만남과 운명

 장마가 길었다. 하루라도 비가 잦아들 날이 없었다. 장마는 한동안 그칠 줄 모르는 아이의 울음처럼 지루하고, 끈질기게 이어졌다. 세상은 평소보다 낮은 채도를 띤 채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도심의 마디가, 낮과 밤의 경계가 흐릿했다. 하루하루는 반복적으로 흐르고,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는 일이 잦았다.  제때 널지 못한 빨랫감이 하나둘 쌓여갈 즈음, 집안에선 점차 퀴퀴한 냄새가 났다. 향을 피우고, 방향제를 뿌려봐도 소용없었다. 향은 잠시 제 자리를 지키다 금세 사라졌다. 장마에 길들여진 집은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체취처럼 진한 물비린내를 풍겼다. 정말 유례없는, 난데없는 장마였다.


 비가 사그라들 무렵, 연이어 태풍 소식이 들려왔다. 이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지구는 자학하듯 자기파괴적으로 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취재차 협조를 요청드렸던 몇몇 곳에서의 촬영이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일정을 가능한 대로 미뤘다. 불가피하게 취재가 취소된 장소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한 어르신만이 언제쯤 올 거냐며 태연하게 물으신다. 내가 괜찮으시냐고, 태풍 피해는 없으셨냐고 안부차 말씀드렸더니, 그런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진즉에 장마로 피해를 볼 것들은 다 봐 피해 볼 게 남아나질 않는다는 얘기였다.


"오려거든, 몇 주 후에 왔으면 좋겠는데."

"그럼요, 당연하죠. 근데, 준비해 갈 건 없을까요."


어르신이 잠시 뜸을 들였다.


"몸만 와. 근데, 뭐 볼 게 많이 없을 것 같아, 걱정이네."

"괜찮아요, 어르신. 그게 별일인가요."


 이 주가 흘렀다. 나는 어르신이 일러준 장소 근처에 다다를 즈음 길을 헤맸다. 길을 쭉 들어오다 보면 작은 다리가 하나 나온다는데, 통 보이질 않았다. 제 자리를 얼마간 맴돌았다. 도로를 따라가고 있으면서도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한 참을 가도 이 길이 어디를 향하는지 말해주는 이도 가르쳐 주는 표식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어르신께 전화를 걸어 다시 물었다. 어르신, 다리가 없는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 큰 나무쪽으로 쭉 올라가면 다리가 나온다는 거죠. 그지, 그렇지. 근데, 다리가 없어요 어르신. 이상하네, 잠시 기다려봐. 이어, 전화기 밖으로 아내분과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가 안 보인다는데, 내가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곧 어르신이 반대편 길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몇 번 주위를 둘러보시곤, 이내 팔을 휘저으며 반원을 그려 보인다. 우측길을 쭉 따라가 돌아오라는 뜻이었다. 들은 바로는 태풍이 심할 적에 다리가 무너져 내린 것 같다고,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하셨다. 그럼요, 다행이죠. 그지, 사람이 안 다친 게 어디야.


어르신과 간단하게 말을 붙인 후, 잠시 석류밭을 걸었다. 석류나무는 대체로 앙상했다. 가지가 야윈 팔처럼 가늘었고, 낙과가 많았다. 제철 맞은 석류는 제법 크고 둥글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발에 석류가 치였다. 태풍 때문이냐고 묻자, 장마가 올 적부터 이미 다 떨어져 나갔단다. 내 이런 장마는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거 같아, 어르신이 찡그린 인상으로 말했다. 올 초부터 힘들여 돌봐온 것들인데, 다 이 모양이 됐다고. 그나마 하우스를 몇 곳 쳐둔 데가 있어 다행이긴 한데, 양이 많지는 않을 거란다. 불가피한 일이긴 하나 이 정도 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고도 말씀하셨다. 


"그래도, 색이 예쁜 거 같아요. 제법 붉은 티가 나는데요."


내가 석류 하나를 손으로 집어 말을 건네자, 어르신은 겉만 봐서는 모르는 거라며 석류의 속을 갈라 보였다. 석류 알이 허여멀건 게 잘 모르는 내가 보아도 시원찮았다. 그에 대고 무어라 말을 보태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말없이 걷기만 했다. 과한 습기 탓인지 조금만 걸어도 몸 전체가 금세 눅진해졌다. 진한 곰팡내 비슷한 냄새가 수시로 코를 찔렀다. 긴 장마로 인해 석류가 물러져 썩은 모양이었다. 숨을 쉬는 데에 힘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진 석류를 훑어가며 무심코 걸었다.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바닥에 놓인 석류는 색이 고운 탓인지 그런대로 썩 보기가 좋았다. 피고 진 꽃처럼 긴 여운을 만들어냈다.


"아쉽지 않으세요?"


어르신이 걷다가 잠시 숨을 돌렸다. 입을 벌린 채 속을 드러낸 석류가 발에 툭 치였다. 나는 석류를 한 번 바라본 후, 이어 어르신의 옆얼굴을 쳐다봤다. 조금은 쓸쓸한,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홀가분한 듯한 묘한 표정이었다.


"아쉬울 게 뭐 있어, 농사가 다 그렇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겠어."


그렇다. 생각보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있다고 한들, 대부분 착각이다. 우리는 대부분 그 착각 속에 평생을 허우적거리며 사는 게 전부다. 어르신은 깊이 석류밭에 들어서곤, 다시 발길을 돌릴 때쯤 석류 몇 알을 주섬주섬 챙겼다. 이건 먹어도 된다며, 그중 몇 알을 내 손에 쥐여주기까지 했다. 먼 길 온 사람대접할 석류는 남아 다행이라고도 말씀하셨다. 석류를 건네받는 순간, 잠시 석류 향이 코를 스쳤다. 그만 참지 못하고 내가 물었다.


"어르신, 근데 석류는 어쩌다 기르게 되신 거에요."


어르신이 웃는다. 대답을 듣기 전부터, 괜히 마음이 근질근질해진다.



어느 날, 어르신이 술에 잔뜩 취해 시장에 들렀단다. 그때 거기가 말바우시장이었었나,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맞다고, 해장하러 자주 찾던 음식집이 있었다며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군대 동기들과 모처럼 만나, 종일 술을 들이켜다 해장을 하러 들렸던 참이었다고. 해장국을 들이키다 술 몇 병을 시켰고, 그러다 보니 또 자연스레 늦게까지 술을 먹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근데, 시장에서 한 할머니가 석류를 파는 거예요. 다라이 안에다가 석류를 몇 알 놓고 팔아. 나는 그게 처음 석류인지도 몰랐어. 아무튼 내가 그래가지고 궁금해서 얼마냐고 가격을 묻는데, 그 작은 게 비싸기는 또 그렇게 비싸. 그게 참 신기하다 해서 이게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까 석류라는 거야. 그러다 일행이 있으니 거기서 눌러앉아 더 여쭤보기도 뭐하고 해서, 해장하러 마저 들어갔지. 그러다 늦게까지 술을 한 잔 더 걸치고, 또 밤까지 마시다가 결국 집도 못 내려가고 꼼짝없이 발이 묶였어. 그래서 해장을 하러 이튿날 시장에 다시 들르게 된 거고. 


"근데, 마침 또 석류 할머니가 보였던 거예요. 참, 이런 우연이 어딨어. 그래서 내가 다시 말을 붙였지. 도대체 이 열매는 어디서 따오는 거냐고 물으니까, 자기 집에 석류나무 세 주가 있다는 거야. "

"참 신기하네요."

"그렇지, 신기해. 우연이지. 그러고 보면 세상에 우연이 아닌 일이 뭐가 있겠어요,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따지고 보면 우연이지. 어떻게 알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무슨 인연으로 만났겠어. 아무튼,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석류나무 몇 주를 사 와가지고 기르기 시작했는데, 옮겨심기만 하면 얼마 못 가 다 말라 죽어. 이걸 어떡해. 참으로 이상하다 싶어 감나무를 기르는 양반께 가서 심는 법을 배워와 고대로 따라 했는데도, 영 시원치 않아. 그래서 버렸어. 전부 다 버렸어, 길바닥에."


어르신의 입가에 다시 한번 웃음기가 번진다. 장난기가 섞인 얼굴로, 두어 번 큭큭거리다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석류나무를 이렇게 기른 줄 알아요?"


나는 주위를 한 번 슥 훑었다. 석류 나무가 지천에 널려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저 멀리 우리가 지나왔던 길의 초입이 가까스로 비쳤다.


"길바닥에 내동댕이쳐 놨는데, 석류나무가 이상하게 죽질 않아. 버려둔 그대로, 어찌어찌 자라고 있는 거야. 그래서 얼마간 더 놔뒀는데, 이게 죽기는커녕 잎도 색이 파랗게 올라오는 것이 신기해. 돈 들여 석류나무를 사 왔다가 낭패를 보고는 어찌 해야 하나 하던 참이었는데,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드는 거지. 나중에 알고 보니, 석류는 뿌리를 깊게 심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감나무처럼 뿌리를 깊게 심어서는 자라질 않았던 거지. 나는 그걸 몰랐거든. 참, 이런 우연이 어딨어. 이런 게 운명인가 싶기도 하고 말이야."


그 말을 듣고 나니, 무엇보다 어르신의 저 태연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삶에 명백한 근거는 없다는 것. 이렇게 될 줄 몰랐으나, 어떤 일은 결국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것. 다만, 어떤 가능성의 범위 내에서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인연이 닿는 순간의 발자취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직선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곡선의 형태를 띠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준비된 운명처럼 서로를 향하지 않고, 어쩌다 접어든 길목에서 마주치는 것, 그 짧은 만남이 곧 우연일 테고, 그다음은 운명이 하는 일이겠다. 


어르신은 걸으며 손에 집히는 석류를 쓰다듬었다. 그중 몇 개는 따다 주머니에 찔러 넣기도 했다. 그래도 발에 치이는 석류보다 손에 잡히는 것이 많아 다행이라고 하셨다. 이토록 혹독한 여건 속에서도 붉은빛을 띠는 걸 보니, 가을이 가을이긴 한 모양이었다. 계절은 계절의 몫을 다하느라 안간힘을 부렸을 테고, 석류는 가을의 기미를 앓다 겨우 붉게 빛을 틔운 것이겠다.


 몇 걸음 걷자 밭의 입구 너머론 아들이 운영한다는 석류 가공 공장이 언뜻 비쳤다. 석류즙을 짜내는 곳이라고. 나이가 있으니, 이제 여력이 있는 젊은 사람이 해야 할 때란다. 어르신은 자물쇠를 따고, 공장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전반적으로 깔끔하니, 잘 정돈되어 있었다. 석류즙을 숙성시키는 냉장고를 제외하면, 시설 내부는 대체로 고요했다. 어르신은 안내하면서도 초행길에 나선 사람마냥 자주 주위를 살폈다. 새로 설비를 들여놓은 이후로는 자신이 관리를 하지 않아 모르겠다고 하셨다. 냉장고 구석 한쪽에는 포장된 석류즙이 가득 쌓여 있었다. 어르신이 포장을 뜯으며 내게 건넸다. 여기까지 왔는데, 석류 맛은 보고 가야지.  


 촬영을 마치고 장비를 싣는데, 석류즙이 담긴 곽 하나를 내미신다. 가면서 마셔요. 충분히 많이 먹었는걸요. 가져가서 좀 나눠 먹고도 그래야지. 이미 날은 벌써 저물어 어둑했고,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가,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뭘, 연락까지 해요. 조심히 가요. 그에 대고 내가 멋쩍게 웃자, 어서 가라는 듯 손을 휘젓곤 돌아가신다. 그렇게 자리를 뜨며 얼핏 비치는 뒤 풍경을 슬쩍 쳐다봤다. 쉬이 뜨지 못하고 대문 앞에서 눈 배웅을 하는 어르신이 보였다.


올라가는 길. 길고 지루한 시간 속에서, 이 모든 우연한 순간들은 꿈결인 양 금세 희석되어 가라앉았다. 그럴 때면 나는 잠결에 뒤척이듯 손에 든 석류 가지를 힘주어 잡았다. 그러면 내가 지금 한 우연의 지점을 지나왔음을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삶의 흔적을 점자처럼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

이음

에세이와 소설을 씁니다.

E-mail : sks9396@naver.com

Instagram : @eumm032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