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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광 Oct 11. 2020

4. 낙타의 삶

흔들리지 않는 꿈을 꾸다

저만큼 내 시선이 떨어지는 곳, 뜨거운 사막 위를 한 마리 낙타가 걷고 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주인의 손에 이끌려 느릿느릿 걸어간다.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짐을 지고 있는 탓에 마른 몸뚱어리가 더 가냘프게 보인다. 눈은 젖어 있고 발은 부르터져 있다. 하지만, 주인이 쉬라고 하기 전까지는 그저 앞만 보고 걸을 뿐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걷고 또 걷지만 변한 것이 없으며, 그의 곁엔 항상 하늘과 모래뿐이다. 어제도 내일도 같은 풍광이다. 아주 먼 길을 떠난 듯하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무르고 만다.     


아부다비 사막에서 만난 그 낙타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던 것은 정해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내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고 여겼고, 시간을 쪼개어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사실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많이 온 것 같지만 막상 그리 멀리 오지 못한 것 같기도 했고, 그러는 동안 나는 낙타처럼 길들여져 갔다. 그저 걸으라고 하면 걷고, 뛰라 하면 뛰었으며, 멈추라 하면 멈췄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사는 게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삶이며, 내게 맡겨진 역할이라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짊어지고 있는 짐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거워져만 갔으며, 아무리 많은 것을 채워도 부족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 같긴 한데 그 세월을 증명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증명할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 시간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낙타의 삶과 많이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려왔다. 짜여진 틀에 맞추어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서 무언가에 이끌리듯 여기까지 왔다. 그저 그러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직장은 어느덧 생계의 수단을 넘어, 나 자신을 나타내는 정체성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직장이 모든 것이었고, 곧 나의 인생이었다. 

그렇지만 매일 매일 똑같은 일상 가운데 나는 어느덧 지쳐가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남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왔던 삶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욕망과 삶에 나의 시간을 쏟아왔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열망을 외면하고, 오늘을 넘기고 현재를 살아내는 것에만 치중해왔다.    


사람들 대부분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그러나 엄밀히 얘기하면 그것은 자신이 만들고 발전시킨 품성이나 자질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위해 여기저기에서 끌어 모은 파편들에 불과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끊임없이 내가 가진 것과 남이 가진 것을 비교하며 가치를 매겼고, 남들처럼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지는 걸 성공의 삶이라 여겨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 의지대로 살며,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남들이 원하는 가치를 추종하는 삶이 잘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뿐이다. 그런 착각이 몹시도 나쁜 까닭은, 평생을 주인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낙타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그럴듯해 보이기에 얻으려고 애쓰는 일은 그래서 가슴 아픈 일이다. 인생이 순조로울 땐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삶은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위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위기와 고난이 찾아오면 반드시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비바람이 몰아칠 때가 있다. 폭풍우를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곡식은 여물지 않는다. 그 바람을 견뎌야 뿌리가 더 땅속에 깊이 들어가는 법이고, 열매가 풍성해지는 법이다.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피하고 싶은 시간이지만, 남들에게 보이는 것에 치중하며 살아온 이들에게는 더욱 견디기 힘든 시간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생에도 마치 정답이 있는 것처럼 살아왔기 때문이다. 

삶에도 정해진 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어떠한 예외와 벗어남도 용납하기 힘들어진다. 그런 인생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면 그들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삶의 무게에 휘청거린다. 남들이 정해 놓은 목표에 자신의 삶을 맞추어 왔던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폭풍 자체의 두려움보다도 비바람을 맞고 있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를 먼저 걱정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어김없이 폭풍의 시간이 찾아왔다. 처음엔 비바람을 피하려 어디론가 숨으려 했다. 안전한 곳을 찾아서 이곳저곳에 몸을 파묻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비바람이 지나가곤 했다. 그런데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폭풍우가 몰아치자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강한 비바람은 더 이상 피할 곳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전한 곳이 없었다.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홀로 서 있게 되자, 나는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며 살아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 자신에게는 정작 제대로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로 남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잘사는 것으로 착각해왔다. 삶의 목적도 없이 어디서 출발해서 어느 곳을 거쳐 왔는지도 돌아보지 않았음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보이는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니다. 마음이 원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의지에 따르는 삶이 아니므로 당연히 자신의 삶이 아니다. 타인의 삶이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이며 다른 사람의 생각대로 왜곡되는 삶이다. 때때로 우리는 보이는 것들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자신의 삶은 잃어간다. 삶의 의미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들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이 삶의 본질적인 이유인 것이다. 

항해를 하면서 폭풍을 만나게 되면 진로를 바꿀 수 있어야만 한다. 적당한 때 닻을 풀어 적절한 장소에 배를 고정해야 한다. 진정한 나 자신을 마주함으로써 자신의 소명과 목적을 찾는 일은 인생의 나침반이 되고, 닻이 되어 준다. 남들에게 괜찮고 그럴듯한 것에 마음을 뺏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돌아보게 될 때 막막한 바다에서 항로를 잃지 않게 된다.


사막에서 신기루를 본 적이 있다. 발목까지 푹푹 잠기는 사구(砂丘)를 더 이상 걷기 힘들 때였다. 내 목 뒤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이글거리던 사막이 낙조 내린 바다처럼 붉게 물들었다. 황홀한 풍경에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모래언덕이 일렁였다. 살아서 꿈틀대는 것 같았다. 맞닿아 있는 하늘과 황토빛 땅이 뒤집어질 것만 같던 순간, 완벽한 적막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적막함 가운데 저 멀리 낙타 한 마리가 어렴풋 보였다. 고개를 떨군 채 붉은 석양 아래 외롭게 걸어가고 있는 그 낙타는 여전히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걷고 또 걸어도 제자리에 머물고 마는 낙타의 삶과 이별하기 위해서는 ‘보이는 삶’이 아니라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남들이 가진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자유가 있는 삶,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열정적인 삶,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이자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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