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쓴 단상
편집자보다는 작가로 살고 싶은 내게 소소한 로망은 아침에 자유롭게 조조 영화 한 편 보고, 조용하고 공기 좋은 카페에서 허니브레드와 아메리카노로 아점저를 먹고 편안하게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거다. 카페 음악보다는 내가 선곡한 재즈를 들으며...
로망이라고 할 수 없는 소소한 소망이지만, 편찮으신 어머니 돌봄에 어린 두 아들의 아빠, 몸이 약한 아내의 남편, 그리고 브랜드 하나를 책임지는 1인 편집장으로 매달 출간 목록과 향후 3개월치 기획안 실행에 대해 머리와 몸이 남아나지 않는 내게는 엄청난 사치와 같은 자유다.
오늘 그 로망을 실현하고 있다. 아내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오늘 휴가임을 말하지 못했다. 나는 폭발하기 직전의 한계치에 이르렀고 솔직하게 말하기보다 일탈을 해보고 싶었다. 게다가 어제 밤늦게 어머니 간호 마치고 마트에 들려 간호 용품, 생활 용품, 영승이 크리스마스 선물 등을 할인 쿠폰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사느라 자정 넘어 들어와 번아웃됐고, 이러다간 그대로 미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아침에 나보다 먼저 일어난 영승이는 아빠가 동트기 전에 출근하지 않은 것과 자기 선물(무선 조종 자동차)이 머리맡이 아닌 거실에 있는 걸 발견하고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다. 자동차를 조립해 주고 막 깨어난 둘째 예승이를 쓰다듬은 후, 출근 후 바로 양평으로 가서 간증하는 일정으로 하고는 영승이 유치원부터 데려다주었다.
오늘 본 조조 영화는 호빗 2편(스마우그의 폐허)이다. 하마터면 이 명작을 놓칠 뻔했다. 무슨 배급 문제가 있기에 오전, 오후 그것도 작은 상영관에서 한 편씩만 하는지 모르겠다. 난장이국의 왕인 소린의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가 참 좋았지만, 백미는 요정 레골라스의 사랑을 받는 여전사 갈라드리엘(케이트 블란쳇)의 다이내믹한 액션과 따듯하고 정의로운 캐릭터였다. 갈수록 남자 액션보다는 이런 니키타 류의 여자 배우 액션이 영화에서 흥미를 끈다. 이번 2편에서는 간달프의 역할이 너무 미비했다. 마지막에 용과의 전투가 본격화되기 전에 끝나 161분의 긴 러닝타임에도 관객들은 아쉬워하며 내년을 기다릴 테지만, 그 아쉬움 때문에 혹평하기에는 영화의 스케일과 반지의 제왕 3부작으로 얻은 고마운 추억이 참 깊다.
주차 시간 오버할까 봐 바로 차를 빼내어 양평으로 달렸다. 천천히 80킬로로 팔당을 지나 겨울 강물을 감상하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을 들으니 긴장이 풀어진다. 7시 예배인데 여유 있게 2시즈음 양평 시내로 들어왔다. 내 로망대로 이디야 커피숍을 찾아 다양하게 편곡된 캐럴을 들으며 허니브래드와 아메리카노로 식사를 대신하고 글을 쓴다. 거창한 휴양지에 가지 않아도 내게 이처럼 카페에서 누리는 3시간 여의 자유는 구원과 다름없는 휴식이다.
올해 내게 기억에 남을 일이라면 3월부터 현재 일하는 더드림의 편집장이 된 것 그리고 8권의 책을 만들고 그중 5권은 순수하게 내가 만나온 저자들을 기획 발굴한 것, 그리고 그중 한 권은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 지금도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 등이다. 그 와중에 중년 남자들에게 닥치는 우울과 고독도 있었고, 열정적으로 일하며 얻는 환희도 있었다.
의식 없이 식물인간 상태가 되신 어머니 병간호한 지는 17년째에 접어들며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 따지지도 못하고 그저 감당해 가고 있다. 솔직히 많이 지쳤다. 간호하기 힘들어서 지친 것이 아니라 이 긴 세월 동안 어머니의 인격에 스민 고통이 느껴져 많이 괴롭고 지치게 된다. 경제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다. 내게 병원비를 따로 떼놓으면 5인 가족이 최저 임금보다 못한 재정으로 사는 것과 다름없다.
황교진이라는 사람을 그가 청년기 때처럼 굉장히! 편찮으신 모친을 믿음 하나로 뚝심 있게 지키며 간호하고 감당하는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영승, 예승의 아빠이며 책 만드는 편집자로 인식하는 지점으로 넘어온 것은 은혜요 감사한 일이다. 그 사이에서 당사자만이 느끼는 깊은 간격과 절망의 골이 있다. 가족도 친척도 공동체도 모르는 이 혼자만의 시름과 고통은 깊은 우울을 안기고 헤쳐가기 힘든 무게의 짐이 어깨를 짓누른다. 그래서 오늘처럼 절망을 완전한 희망으로 바꾸거나 고통을 완전한 치유로 바꾸어 놓지 못해도 그렇게 돌보고 감당하는 것만으로 성탄예배 강사로 초청받으니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는 생존을 위해 열심히 운동을 했고, 책 만드는 일로 벌이를 해결했고, 이렇게 개인적으로 쓰고 싶은 낙서로 자가 치유를 받아왔다. 그 끝은 모른다. 답도 알 수 없다. 일전에 쓴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말로 빗댄 고백처럼.
어제 잠들기 전 <응답하라 1994> 18화를 보니 IMF가 터진 것이 1997년 11월 21일이더라. 바로 그 6일 후부터 어머니는 내게 "아들아" 하고 한 번 불러보지 못하시고 의식 없이 누워 계신다. 솔직히 그때는 국가 전체가 고통과 절망인 것이 내겐 차라리 편했다. 우리 모자의 고통을 국가 전체가 앓아 주는 듯했다. 시간이 흘러 집에서 8년을 간호하고 병원을 찾아 옮겨야 했을 때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이 된 2004년 봄이었다. 그때는 집에서 어머니를 병원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고통과 맞물려 날마다 통곡하며 보냈다. 2009년 그가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렸을 때는 내가 첫 직장에서 엉뚱한 일에 휘말려 권고사직으로 나와야 했을 때였다. 돌아보면 내가 너무나 괴로울 때 그에 관한 거대한 소식이 들려왔었다.
요즘 엄마의 인격에 대해 생각할 때 영화 <변호인>을 보고 국가의 격에 대해 들여다보는 중이다. 노동자를 탄압하는 국가, 서민들이 갈수록 신음하는 국가, 나처럼 힘들게 하루하루를 감당하는 이에게 작은 희망도 주지 못하는 국가, 그냥 이 모든 게 다 지나가겠지, 하는 막연한 긍정만 붙잡아야 하는 시대에 커피숍에서 잠깐의 자유를 갈망하는 소시민 가장의 낙심 국가, 대한민국.
그 시점에 안양 집에서 양평으로 와서 성탄의 기쁜 날, 낯선 교인 분들 앞에 내 얘기를 전한다. 고난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지금 극복을 말하진 못하지만 돌보고 견디고 감당하자는 언어 속에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꿈과 소망이 들어 있을 거라고. 난 그걸 진심으로 전하고 한밤중에 귀가할 작정이다. 소망 없는 중에 소망을 만들어 가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 계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2013.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