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사랑으로 떠올려 본 이야기
0.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강박증 환자이며 로맨틱 소설을 쓰는 잭 니콜슨은 거침없이 함부로 말한다.
상대방의 기분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예의 없고 고리타분한 사람이다. 그에겐 아주 심한 결벽증이 있어
보도블록의 금을 밟지 않고 절대로 약을 먹지 못하는 두려움이 있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보기에 힘들다.
그런 그가 약을 먹기 시작하고 자신의 강박증을 고쳐서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단골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웨이트리스(헬렌 헌트)를 사랑하게 된 속에는 그녀의 '모성애'가 놓여 있다. 남자의 옆집에 사는 게이(그렉 키니어)가 강도를 만나 처참한 폭행을 당했는데, 자신은 근처에도 있기도 싫은 그 게이에게 따뜻하게 위로를 전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가 모성애를 본 것이다. 그녀는 화가인 게이가 다시 그림을 그리고 일어서도록 모델이 되어 준다.
남자는 자신의 속마음과는 다른 실수를 거듭하다가 결국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자신의 강박증도 고쳐 씩씩하게 보도블록의 금을 밟는다.
1.
내가 아는 친구는 어렸을 때 집에서 구박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하루는 그가 어떤 친구의 집에 놀러갔는데 친구 엄마가 라면을 끓여주셨다. 아주 예쁜 유리그릇에 라면을 담아주시는 친구 엄마의 모습을 보고 그는 자신의 성장기에서 유리돼 있던 '모성애'를 느꼈던 것 같다.
지금도 그 친구는 유리그릇의 라면을 보면 '모성애'를 갈망한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고 한다.
2.
나에게도 쓸쓸한 성장기가 있다.
갓난아기였을 때 부모님이 일하시던 마산 부림시장에 대형 화제가 발생해 작은 가게가 전소되고 말았다. 당시 보험도 없을 때여서 어린 나를 친척들 집에 맡기고 부모님은 상경하여 달동네인 서대문구 현저동에 거처를 마련하여 재래시장에서 메리야스 가게를 여셨다.
나는 경상남도에 사시는 외가, 친가의 친척들 집을 떠돌며 자랐다. 그래선지 어렸을 때 포만감이 들도록 마음껏 먹어본 적이 없고 친구나 또래 집단도 없이 늘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았다. 눈치를 많이 보며 그리움과 우울함을 견뎌야 했다.
지금이야 울트라 체력을 자랑하며 없어서 못 먹지만,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린 음식을 본 적도 없는 어린 시절에 몇 안 되는 반찬을 꼭 가려서 편식했다. 초등학교 때 가끔 엄마가 집에서 차려주시는 저녁을 먹을 땐 얘기가 달라진다. '엄마가 만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무 반찬이나 다 맛있게 먹었고 밥그릇을 싹싹 비워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가끔 이모가 자신이 만들었으면서도 엄마가 가게 나가시기 전에 만들어 놓고 간 반찬이라고 나를 속이기도 했다.
3.
초등학교 때 지금의 독립문 근처의 영천시장에서 어머님이 메리야스 가게를 하셨는데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며 놀다가(그래서 지금도 재래시장의 생선과 나물 냄새들을 맡으면 그때가 기억난다), 어떤 식당 아줌마가 음식을 배달하다가 내 어깨 위로 뜨거운 국을 쏟은 적이 있었다.
옷을 찢어 살펴본 어깨 부근에는 심한 화상이 생겼다.
엄마는 나를 업고 병원으로 뛰어가셨는데 그때 살에 떨어진 뜨거운 국으로 인한 고통보다 엄마 등에 업혀 있는 순간의 포근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4.
고등학교 1학년 부활절 때 처음 교회에 나갔다.
전도한 사람도 없이 미션스쿨이던 학교 채플시간이 좋아서 내가 스스로 교회를 찾아갔다. 전도사님이 설교하시기 전에 꼭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었다. 나보다 한 살 적은 어느 여학생이 음료수를 들고 강대상 쪽으로 가서 전도사님이 설교 중에 드시도록 드리고 오는 예쁜 모습이었다. 고등부의 모든 남학생들이 좋아하는 퀸카였다.
난 처음 교회에서 그 여학생을 본 순간, 섬뜩할 만큼 강렬한 '모성애'를 느꼈다.
어느 계곡에서 천막을 치고 진행한 여름수련회에서 그녀는 프라이팬에 라면을 올려 볶아서 고소한 과자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해 여름 내내 그 모습과 맛이 머리에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그리고 그때부터 애달픈 그리움으로 입시와의 전쟁 기간을 포함하여 장장 6년이나 그 아이를 멀찍이서 보며 좋아했다.
5.
대학에 들어온 뒤 ivf에서 만난 같은 학번 동기들 중에 유독 영문과 학생들이 많았다.
ivfer가 아닌 영문과 여학생들과도 함께 밥을 먹고는 했다. 그중에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 꼭 껌을 챙겨 주는 여학우가 있었다. 영문과 친구들은 그 여학우를 '껌녀'라고 불렀는데, 난 그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밤새워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녹음하여 다른 친구를 통해 선물하고 편지도 전했다.
1학년 마치고 군에 입대한 뒤에도 줄기차게 편지를 보냈다. 삭막한 군 복무 기간 동안 내 가슴속 그 여학우의 존재는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6.
제대한 후 여름 농활을 갔을 때였다.
아침 식사 당번은 큐티를 일찍 마치고 조원들과 식사 준비를 했는데, 그날 아침식사 메뉴에 계란 프라이가 있었다. 한 30명 즈음되는 농활대원들의 계란 프라이를 일일이 만들던 식사 당번 여학우의 손길이 참 예뻤다. 상명여대 92학번이었다. 그런데 배식하다 보니 계란 프라이가 모자란 것이다. 그 여학우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면서 자기 식사를 포기하고 구석에 앉아 혼자서 모자란 계란 프라이를 계속 만들며 공동체를 섬겨 주었다.
(그 식사조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밥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도와주고 싶었지만 제대한 지 얼마 안 되어 소심한 마음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 난 그 여학우가 아침도 거르고 대원들의 맛있는 식사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 가운에 따뜻한 모성애를 느꼈다.
1주일 간의 농활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뒤, 용기 내어 연락했다. 같이 롯데월드 시네마에서 애니메이션 <라이언 킹>을 봤다. 심바의 아빠가 심바를 구하고 소떼에게 깔려 죽는 장면에서 옆에 앉은 그녀를 슬쩍 보니 엄청 울고 있었다. 애인이었으면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는데...
영화 보고 나서 보니 그녀는 한 달 전에 소개팅한 사람과 잘 사귀고 있다고 한다.
에그~~ 참... 헛물켰다.
농활에서 계란 프라이와 영화 보며 우는 모습은 여전히 가슴속에 들어와 있었다.ㅠㅠ
7.
4학년 가을, 처음 교제를 시작했을 때 가장 좋았던 것은 매일매일 그날그날의 내 얘기를 들어주는 연인과의 전화 통화였다.
생각해 보니 난 자라면서 누군가와 하루의 일, 학교 생활, 친구들과의 관계, 성경 말씀을 통해 느낀 적용 등을 자주 나눈 적이 없었다. 모든 걸 내가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고 책임져 왔다. 늘 밤에 일을 하시는 어머니, 친구들과만 어울리며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경상도맨 아버지, 성이 다르고 연년생이기 때문에 대화가 드문 여동생..
주일날 교회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길게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옆에 앉아 바라보는 것이 내가 모성애를 느끼는 무언의 깊은 대화였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어머니, 놀이동산에 데리고 가서 놀아주는 부모의 모습은 내겐 스킵되어 있는, 이다음에 내가 가장이 되고 난 뒤 내 아이들에게 베풀며 치유받아야 할 상실의 갈망이다.
8.
지금도 누군가 "힘들지?" 하며 한 마디 건네줄 때 고맙고 힘이 된다.
사람들은 늘 "어머니는 좀 어때?"라고 물으며 혹시 좋아진 건 없는지 궁금해하는 데만 익숙해 있다. 늘 같은 모습이고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나빠지는 상황들을 지켜보고 싸우고 있는 나로서는 한결같은 질문에 한결같은 대답으로 마주하기가 힘들다 이를 사람들은 별로 눈치채지 못한다.
'모성애'가 담긴 위로의 한마디가 너무나 그립고 보고프다.
9.
그래서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 말씀에 아주 큰 은혜를 받는다.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신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과 아이를 돌보는 유모의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바울의 서신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통해 채울 수 있는 '모성애'를 명확히 보고 믿게 된다. 아니,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다고 믿고 따르기 원한다.
10.
'모성애' 이보다 더 좋은 건 없다! 내게는.
2001.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