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우면 가라앉는다
고 노회찬 의원은 밝음을 어떻게 유지하냐는 질문에 "너무 무거우면 가라앉아요."라고 답해 가벼움의 긍정을 언급해 주었다. 진중함은 갖추고 가벼움은 버려야 할 무가치한 모습이라 여겨왔는데, 그의 말에 가볍게 살면서 가벼운 농담을 즐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삶이 너무나 고되고 괴로운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도 그렇다. 말도 안 되는 희망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사람이 많다. 특히 기독교인이 그렇다.
내가 식물인간 상태의 어머니를 간호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일상을 받아들이고 오랜 기간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점차 하나님이 어머니의 의식 회복이라는 기적은 주시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내 믿음이 얕고 하나님의 기적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모든 믿는 성도들에게 병 고침의 기적을 주셨다면 세상에 만연한 각종 질병은 병원이 아닌 교회와 기도원에서 다 나았을 것이다.
20년의 세월을 병간호와 병원비 마련으로 싸우고 버티면서 랜선에서 다양한 사람을 접했다.
그중에 극단적인 두 부류가 기억난다.
첫 번째는 "당신이 무슨 심청이냐?"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사람이 있었다. 홈페이지에 지나가는 손님이라 별 대응을 하지 않고 무시했지만, 참 사람들이 할 소리 못할 소리 구분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종종 '효'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글을 썼다. 중학생 소녀가 아버지 눈을 고치려고 자기 목숨을 던지는 행위를 오랜 미담으로 말하는 것에 비판적이다.
사랑에 대해 많은 글을 썼지만,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건 자유니까(효 운동하시는 분들 별로 공감하거나 동참하지 않는다. 뭐 초청받은 적도 없지만).
또 한 부류는 자주 만나는 댓글인데 "어머님이 쾌차하시길 바란다"는 말을 툭 던지는 이들이다.
그 댓글을 대하면 경망스럽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응원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위로의 대상이 어떤 맥락의 삶을 살아왔는지 조금이라도 공감한다면 이런 하나마나 한 희망의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기계적으로 가족이 아픈 사람에게는 쾌차하길 바란다는 말을 던지는 식이다. 진정한 위로가 아니라 돌팔매로 다가오기도 한다. 어머니 쓰러지신 그 초반이라면 모를까. 20년을 의식 없는 분을 돌보는 사람에게 쾌차라는 단어를 쉽게 쓴다.
아픈 사람들에게 섣부른 희망의 말로 위로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위로가 마음에 와 닿는 공감의 위로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이 햇빛에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졌으면 좋겠어요."
"오늘 식사 잘 하셨어요? 꼭 잘하세요."
"손이라도 잡아드리고 싶어요."
중병의 간호를 오래 해온 보호자에게 나쁜 희망의 말로 위로하는 건 답답한 한숨을 더하게 한다.
경쟁과 성장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 특히 기독교인이 잘 위로할 줄 모른다. 기도한다면서 기도 안 하고, 어떤 병인지 맥락을 알아보지도 않고 쾌유를 쉽게 쓴다.
그래서 크고 긴 고통과 싸우고 있는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가벼움이다. 노회찬 의원이 자신의 특별한 유머가 토론회장에서 툭툭 튀어나온 것은 가볍게 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처럼 자신보다 진보와 정의당을 먼저 무겁게 생각한 정치인이 또 있을까.
나는 가볍고 단순하게 지나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 무거운 삶을 이기는 습관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가벼워 보여도 진짜 위로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쾌유를 말하기 전에 현재의 아픔에 먼저 공감하는 말, 희망보다는 현재의 고통에 동참하는 말.
그리고 나쁜 희망의 말보다 좋은 공감의 말을 가볍게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