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인터뷰를 하다
by 황교진 Jun 10. 2018

약자들을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

해외 교사 양성과 교육 콘텐츠를 지원하는 권기정 대표 _2부


권기정 대표는 지역개발사업의 NGO에서 아동 결연, 아이들 학교 보내기 등의 맥락으로 활동했다. 그 가운데 아동 결연 사업의 한계를 보게 된 이야기부터 들어보았다. 

 

가난한 마을의 아이들 중 일부만이 결연을 맺어 직접적인 지원 받죠. 다 같이 가난한 동네에서 결연되지 않은 아이들이 소외되기 마련이에요. 바람직한 방법은 마을(혹은 학교)을 대상으로 후원을 연결하는 거예요. 그러나 한국의 구호단체에서는 한 아이를 지원하는 시스템을 선호합니다. 마을을 살리는 지향점으로는 후원자 개발이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에요. 구호 단체들은 아동 사진을 걸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결연을 맺지만, 실제적으로 해당 마을에서 일어나는 소외와 배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요. 마을을 살리는 사업, 마을을 돕는 사업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엔지오들은 후원금을 보내고 지역 대상 프로그램을 진행하지만 제3세계 현장 분위기는 다릅니다. 여러 사연의 아이들이 존재하며 그 아이의 인격도 지켜 줘야 하죠. 후원을 기다릴 때는 아이 아버지가 없다가 결연이 맺어진 뒤 낳아준 아버지가 돌아오기도 하고 길러준 아버지가 따로 있기도 해요. 편모슬하의 아이라도 복잡한 가계에 속해 있기도 하는데, 구호단체 직원들이 직접 아이의 사진을 찍고 가정을 방문하여 형편을 일일이 정리하는 것도 적잖은 경비가 듭니다. 해결책은 마을의 현실과 이해관계를 잘 조사해서 마을 전체를 개선시키는 쪽으로 후원하는 거예요. 마을 공동체성을 위해 학교를 살리고 마을을 같이 성장시키기 위한 교육 사업이 그 마을의 미래를 밝힌다고 생각해요.

 

HoE 사무실에서 권기정 대표



 
이이티에서의 경험을 들려주세요.

아이티 지진 피해가 발생하고 바로 아내와 함께 들어갔어요. 피해를 돕기 위한 성금이 정부와 여러 단체를 통해 많이 모아졌습니다. 특히 교회와 선교회의 모금이 많이 들어왔죠. 구호현장에서 선교사, 목사들을 가장 많이 만났어요. 그런데 구호와 지역에 전문성이 없는 사역자들이 많이 와서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현지인들도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발생하곤 했어요. 큰돈을 지니고 다니기 때문이죠. 사전에 전문가에게 조언과 교육을 받지 않고 의욕만 앞선 탓입니다. 그때 이후 교계 엔지오가 많이 만들어졌어요. 여전히 전문적 영역은 없고 현지에서 오래 활동한 사역자들과 협력해도 현장의 필요를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론 그 지역을 잘 아는 것이 유용할 수 있으나, 수십억의 돈을 잘 활용하는 전문성이 없어 문제가 생기기도 해요. 각자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고 필요한 인력을 잘 영입하여 구조적으로 효율성을 높이는 구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권기정 대표의 해외 구호활동에서 남수단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이티에서 활동을 마치고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파송으로 남수단에 들어갔습니다. 남수단은 2011년 7월 9일 독립한 분리 국가로 매우 가난한 지역입니다. 수단의 북부는 상대적으로 정치, 교육, 경제 인프라가 갖춰진 곳으로 이집트와 비슷한 문화권의 아랍계 무슬림이지만, 남수단은 아프리카계 기독교인들로 철저히 개발에서 소외되었습니다. 제가 지원한 곳은 수단이 분리되기 전 이태석 신부님이 활동하던 곳과 나일강을 두고 떨어진 곳으로 내전 이후여서 고아들 지원 사업이 필요했습니다. 독립 이후 부족 간 학살이 계속되었고 생명의 위협은 일상이었죠.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 20여 명의 권총 강도가 위협해 와서 돈과 물자를 훔쳐 가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직원들의 안위가 위태로울 때 SOS를 받은 한국파병부대인 한빛부대 특전사팀이 투입돼 인명 피해 없이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직원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우려로 한국에서 진단을 받기 위해 급하게 소환됐죠. 당시 저만 혼자 남게 됐을 때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포탄이 인근 지역에서 뜨고 탱크로 도로를 봉쇄하고 공항이 폐쇄돼 돌아갈 방법도 없었습니다. 꼼짝없이 갇혀 있다가 4일이 지나자 공항이 열려서 보험회사가 전용기로 구해 주러 왔습니다.

오랜 기간 긴급구호활동을 진행하다가 이번에는 나 혼자 살려고 나왔다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들어 생겨 다시 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남수단으로 항공편이 들어가기 어려워 우간다 공항에서 차량으로 700킬로미터 떨어진 국경에서 남수단 현지인 직원들과 해후했습니다. 혼란한 와중에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들과 국경에서 난민 구호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피란민들은 우리가 원래 지원한 지역에서 400킬로 걸어서 국경까지 피난을 왔어요. 도중에 강을 건너다 악어에 잡혀 먹힌 사람도 있을 만큼 비참한 상황이었죠.

 

남수단 피난민 아이들과



남수단 구호 활동 후 호이(HoE)와 빙고(BINGO)를 운영하고 계신 거죠?

2015년 3월, 아들이 태어날 즈음에 귀국했습니다. 현장의 일은 기쁨과 보람이 컸지만, 각 단체의 철학이 상이했어요. 제가 추구하는 가치를 살려서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개발협력 협동조합 빙고를 시작했고, 호이를 통해 교육 사업도 추진했습니다. 앞으로 본질적인 국제 개발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국제 개발 사업의 현실에는 비본질적인 마케팅 요소도 많고 실질적으로 도움과 상관없는 지원 사업도 많습니다. 한 지역의 한 아이를 후원해서 그 아이가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업을 얻는 것으로 그 지역과 나라가 변화되기는 어렵습니다. 옆 마을에서 의사가 나오나 그 마을에서 나오나 큰 차이는 없어요. 저는 마을 공동체가 나아지고 변화되는 데 집중하려고 합니다.

 




권기정 대표를 인터뷰한 즈음이 세월호 4주기였다. 권 대표는 남수단 내전 직후 극도로 위험한 그곳에서 잠시 한국에 왔을 때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았다. 남수단과는 너무나 다른 한국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1주일 만에 다시 남수단의 국경으로 달려간 것이 2014년 1월이다. 피난민들 지원하는 구호 활동을 계속하던 4월 16일에 한국에서 여객선이 전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한국이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은 남수단 사람들에게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호 4주기가 오도록 미안하고 답답하고 부끄러웠다.

세월호 사건의 부끄러움은 약자들을 보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깊이 가지고 있다. 연약한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럴수록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많아지는 심정이 기독교인의 상식이길 바란다. 이런 바람을 가져야 하는 현실이 또한 부끄럽다.

 
사단법인 호이 후원 문의 02-737-1225
http://www.ihappynanum.com/Nanum/B/ZXV6VR26X0

 



keyword
magazine 인터뷰를 하다
<어머니는 소풍 중>의 저자입니다.
댓글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서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