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화 퇴원
할아버지는 내게 쪽지를 남기고 퇴원하셨다.
'이선생. 항상 고마워. 밥이라도 한 끼 샀으면 해서 전화번호를 남겨달라 했는데, 연락처가 남겨져 있지 않아 대신 내 연락처를 적었어. 여행도 다니고 잘 지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언제 꼭 한번 연락 줘. 못 보고 가서 아쉽네.'
항상 활기가 넘치던 할아버지의 쪽지에는 그 전과는 다른 담담함이 배어있었다. 잘 나오지 않는 검은색 볼펜을 눌러쓰신 흔적이 남아있는 쪽지를 다시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병동을 벗어나 당직실로 향하는 길에 어제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본인이 마주한 인생의 끝자락에서 할아버지는 쉽지 않은 결정을 했을 것이다. 끝까지 설득을 했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금세 부질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사고를 접었다. 자신의 마지막이 언제쯤이 될 것인지를 알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다행스러운 것이다.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중절모 할아버지는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했다. 조금 더 강하게 설득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후회가 되는 일이지만, 의사로서 내 고집이 오히려 할아버지를 더욱 힘겹게 만들 수 있었다. 아마도 할아버지의 병은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방광에서 시작한 암덩이의 성장은 시간이 지날 수 록 더욱 거칠게 일어날 것이고, 다른 장기로 퍼져나가 탐욕스럽게 할아버지의 육신을 갉아낼 것이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나날이 쇠약해져 가는 육신을 바라보는 것, 예고 없이 찾아오는 통증을 이겨내야 하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시련이 될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병원에서 다시 보지 않기를 희망한다.
할아버지가 미워서가 아니라, 그분의 마지막이 이런 삭막한, 차가운 병원에서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좋아하시던 감자전과 막걸리를 맘껏 드시고, 아내분과 여행을 다니며 좋은 추억을 남기시길 바란다.
부디 더 아프지 마시고, 행복한 기억을 담뿍 담아 가시길 바라며, 할아버지의 쪽지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출처: https://mdaslan.tistory.com/61 [의사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