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마법사다. 무엇이든 우아하게 업그레이드시키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점프를 해도 우아하게, 스트레칭을 해도 우아하게, 그냥 일상이 우아하다. 고양이는 심지어 길들여지는 일도 우아하게 만들어버린다. 과연 고양이는 길들여지는 걸까?
집고양이들은 사냥을 할 필요가 없지만, 사냥본능이 여전히 남아있다. 사냥꾼으로서의 본능적 사냥에너지는 몸속에 축적된다고 한다. 아깽이 시절에, 움직이는 집사의 발이 바로 사냥감이었다. 주방에서 밥을 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튀어나와 정확하게 발목을 물곤 했었다. 사냥성공이었다. (물론 아깽이들이 무는 건 아프지 않다.)
고양이에게 눈에 보이는 건 모두 자신의 영역이라고 한다. 지금도 창가를 주시하면서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반응을 한다. 사냥놀이로 일자로 살짝 찢긴 방충망으로 날아 들어오는 벌레도 가끔 있다. 그들의 운명은 장난감이 되어 죽어있기도 하고, 산채로 먹혀버리기도 한다. 그날은 말벌이었는지, 릴리 입에서 나는 그 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야말로 바삭한 소리였다. 릴리는 맛있자냥 하는 표정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말벌도 안 됐다. 굳이 날아들어와서...
탑재된 킬러의 본능을 잃지 않는 고양이, 그건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는 일이다. 어쩌면 그래서 길들여지지 않는 것일 수도.
고양이의 주인은 집사가 아닌, 고양이이다. 고양이는 뼛속까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 그것이 그렇게 우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존재의 주인이라는 그 무게감은, 말 그대로 무겁다. 인간은 스스로의 주인이 되기에도 버거워한다.
고양이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도 고양이가 찰싹 달라붙어 있거나, 가족 사이에서도 특정인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대개 목소리가 부드럽고, 움직일 때 동작이 크지 않고 조용하고 억지로 만지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선을 넘지 않고 경계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고양이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캐치한다. 고양이는 관찰한다. 예의를 지키는 인간인지 아닌지, 도를 넘는 인간인지 아닌지 스캔 중이다.
고양이를 키워보면 고양이와 충분히 친해지고 친밀감을 누릴 수 있음을 알게 된다.고양이는 매정한 냉혈동물이 아니다. 생텍쥐페리의 고전에서 나오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알려준다. 여우인 자신을 길들이는 첫 스텝은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이다. 서서히 다가가고, 묵묵히 기다려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건 결국 상대의 마음의 경계선을 존중하겠다는 뜻이다. 집사가 왔다고 캣타워에서 내려오면서 반겨주고, 머리 쿵으로 반갑게 인사하고, 골골거리면서 만져달라고 들이댈 때면 느낀다. 고양이는 도도하지만, 사랑 표현도 확실하다. 그건 말이 필요 없는 교감의 순간이다. 살아 있는 무언가와 교감을 한다는 건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다.
고양이는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길들여지는 종이 아니다. 고양이는 길들여 질까 말까를 선택하는 종이다. 냥택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길들여졌다고 해도 자신의 영역이 여전히 확실한 고양이, 우아하지 않은가. 생텍쥐페리는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을 흘릴 것을 각오하는 것"이라고 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아주 먼 미래에 집사가 눈물을 흘릴 것은 확실하다. 그러고 보니 집사가 고양이를 길들인 게 아닌, 고양이가 집사를 길들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