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고영희는 러시안블루이다. 러시안블루는 특성상 우는 고양이가 아니다. 집사가 한마디 하면 야옹으로 대꾸하는 수다스러운 고양이도 있지만, 릴리는 아니다. 릴리는 냥냥거리지 않는다. 릴리는 표정으로, 태도로 말한다.
"배고파."
"문 열어줘."
"기분 좋아."
"사랑해."
"귀찮아."
"그만해."
"화났어."
"공격할 거야."
이 모든 표현은 무음모드지만심플하고 강렬하다. 오해의 소지도, 여지도 없고, 선을 넘으면 바로 응징한다. 워낙기척이없으니집사들은고양이목 방울을 달아주기도 한다. 릴리는 목방울이든, 목걸이든 허락하지 않는다. 남아라서 그런가... 귀여워서 시도했던 고양이 스카프도 하루 만에 찢어버렸다. 미... 미안.집사 눈엔 귀여웠는데...
릴리와 보내는 시간은 담담하게 벅차다. 빌리 아일리쉬를 틀어주면 무심한 듯 창가를 보면서 귀를 쫑긋거린다. 책을 보고 있으면 소리 없이 다가와선, 궁금한지벌름벌름냄새를맡아본다. 그러고는 무릎 위에 올라와서 자세를 잡고 그루밍을 시작한다. 가장 편한 자리를 잡고 눈을 지그시 감고골골거린다. 집사에게는 살아 숨 쉬는 냥담요다. 세상 따듯하다. 소리에민감한 집사는 릴리와의 시간이 힐링이다. 살아있는 생명체와 무언의 교감을 한다는 건 신묘한 일이다.뭐랄까.
마음이 초고속충전 되는 기분이랄까.
누군가와 교감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바타에서 나비족은 머리칼로 교감한다. 머리칼로자연과 교감하고, 동물과 교감하고 공감한다. 인간도이런 식이면 쉬울 텐데 말이다.
어쩌면 인간은 교감하는 법을 잊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배운 적이 없거나.
친구와 수다를 떨어도 마음이 허전하다면, 사람들과 모여 있어도 여전히 외롭다면, 웃고 있어도 즐겁지 않다면... 어쩌면 비효율적인 충전 방식을 바꿔야 할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릴리는 말이 없다.
릴리는 내색을 않는다.
릴리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릴리는 필요에 따라 사교적이다. (키워드는 츄르)
릴리는 철학적이다.
릴리는 침묵을 택한다.
우아하지 않은가. 공기의 진동이 없이도, 교감이 가능한 종이다. 누군가에게 말로 아닌, 눈빛으로 사랑한다고 말해보길.
말은 거짓일 수 있어도, 눈빛은 속일 수 없다.
누워만 있어도 철학적인 녀석
가끔 냥냥거리는 고양이들이 귀여워서 말을 시켜보기도 한다.
'릴리야, 야옹해 봐.' '야옹~''므아~'
집사가 고양이들이 반응한다는 온갖 소리를 내어보아도... 릴리는 힐끗 쳐다보고는 창밖을 바라본다. 집사를 냥무시한다.한심하다는 표정인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길냥이들은 집사가 야옹하면 늘 통했는데... 췟.가끔 집사가 짖꿎게 장난을 치면서 도망 못 가게 안고 있으면 오토바이 엔진 소리를들을 수 있다. 성토하는 불만의 소리다. 꽤 귀여운 소리지만 자주 할 수는 없다.
릴리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힘들다. 누워서 골골 가릉가릉, 캔 먹을 때 냠냠쨥쨥, 냥세수 할 때 츄르르촵촵, 물 마실 때 낼롱낼롱... 미약하지만, 집사에게는 가장 행복한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