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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 Dec 16. 2019

일기76





아기는 잘 크는 편이다.

아직까지 병치레를 해서 병원신세를 진 적도 없고 잘 먹어서 또래보다 크게 자라는 중이다. 아이는 밤에도 잘 자는 편이고 방긋방긋 웃으며 낯도 가리지 않아 밖에서도 사랑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아이의 작은 부족함에 너무 크게 반응한 것 같다.


오늘 아침에 이유식이랍시고 준 것을 잘 먹지 못하는 모습에 짜증이 났다.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도 속상하고 한 달째 먹는 이유식을 아직도 잘 먹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니 답답했다. 그래서 다그치고 말았다. 마치 말을 알아듣는 성숙한 아이를 대하듯 따지며 두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먹던 것을 모두 치우고 낮잠을 재웠다. 나도 피곤함을 달래려 그 옆에 누웠다. 조금 후 울컥울컥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아침에 먹은 모유와 이유식을 모두 토해냈다. 찡그림 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입으로는 모든 것을 게워냈다. 의연한 척하며 아이를 안아 들고 씻기다 보니 목 뒤에는 붉은 발진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유식에 처음 넣어본 계란 흰자로 인한 알레르기 반응으로 보였다. 엉망이 된 침구들을 애벌빨래해서 세탁기에 넣는 동안 아이는 자기를 봐 달라고 엉엉 울었다. 진정된 아이를 겨우 다시 재웠다. 그리고 나도 멀찌감치 누워 눈 앞에 보이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본다.


생각해 보니 이럴 때가 또 있었다.

조그마한 아이를 조리원에서 데리고 나와 하루 종일 먹이고 재우고 갈아입히고 씻기기를 반복하던 신생아 시절, 나는 아이를 안전한 벽 쪽에 눕히고 나서 최대한 멀리 자리를 잡고 누웠었다. 아이가 나를 더 이상 찾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에. 너무 지쳐서 등을 돌리고 숨죽였더랬다. 아이와 함께 누운 작은 방 안에 내 흔적은 없기를 바라는 날들이었다.


탈 없이 잘 크는 아이를 두고 너무 자만했다. 속이 안 좋은데 그 위에 이유식을 더 먹인 건지, 이유식을 먹지 않는다고 다그칠 때 놀라서 얹힌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이는 내가 비싼 식재료들로 야심 차게 준비하는 이유식마다 시원찮은 반응을 보인다. 아이의 기준과 내 기준이 다르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그때마다 속상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내 앞에서는 잘 먹다가도 아이의 아빠가 집에 있는 주말이면 아빠에게 정신이 팔려 잘 안 먹기도 한다. 그런 날은 아이 아빠 보기에 묘하게 민망한 날이다.


그런 날들이 지났다.

그럼에도 우리는 꽤 잘 지내는 편이다. 아기가 크게 아픈 적도 없고 또래보다 크게 자라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문화센터에서 적응하지 못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어제같이 새벽에 자주 깨서 나를 힘들게 하긴 했지만 말이다. 아직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 얼마나 감사한 평화인가. 아이에게 오늘의 일은 기억할 만큼 큰일이 아니길 바란다. 그래서 미안한 내 마음도 모르고 지나가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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