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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주Ivy Oct 28. 2022

잊고 있던 꼬마를 만나다

당신은 어떤 아이를 마음에 품고 있습니까

어릴 적 나는 아빠에겐 무서워서 속에 있는 말들을 하지 못했었다면 엄마는 말이 안 통해서 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첫째인 줄 알았는데 내 위에 오빠가 있었다. 그는 세상의 빛을 보고 얼마 있지 않아 하늘나라로 갔다. 

첫 아이를 잃고 낳은 딸이 목숨보다 소중했을 것이고 누구보다 잘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 집 형편은 안됐지만 피아노, 서예, 플루트, 미술학원뿐만 아니라 영어, 논술 학원에 등록해 주셨다. 

사춘기로 한껏 꼬여있던 나는 엄마 마음도 모르고 학원을 빼먹고 친구들과 놀러를 다녔고 수학도 풀기 싫을 때는 답안지의 풀이 과정을 그대로 베꼈다.

큰 딸 콤플렉스로 힘에 부쳤던 나는 내 위에 오빠가 살아 있었더라면 맏딸 부담감에서 벗어나 좀 더 편안하게 살았을까? 

힘들 때 오빠에게 전화해서 '오빠, 술 한잔 하자' 라며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있었을까? 

사춘기 시절 엄마와 나와 끝없는 전쟁을 할 때 오빠가 중재하며 '엄마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봐 사춘기 때는 원래 이런 거잖아 조금만 봐줘'라며 내 편을 들어줬을까? 

맏딸로서 느끼는 성공에 대한 압박이 조금은 덜어졌을까? 

폭식증을 겪는 동안 힘이 들 때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마음의 짐을 털어 냈었을 수 있었을까? 

시간 낭비를 하는 쓸데없는 상상인 것임을 알면서도 내가 둘째였다면 막내였으면 어땠을까라는 바보 같은 상상을 해본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오빠가 있었다는 것을 어릴 때 알았지만 내겐 없는 기억이어서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사실 없었던 일이거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 아이를 잃은 엄마 아빠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엄마가 왜 그렇게 나를 잘 키우려고 애쓰셨는지 조금이나마 이해 갔다.


사춘기 시절 친구들이 나를 좋아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컸었다. 이때부터 나도 모르게 남들과 비교를 하기 시작했고 예쁜 반 친구를 보면서 더 예뻐지고 싶었다. 

여드름이 많았던 이마가 미워 매일 손톱으로 자국을 낸 탓에 이마는 늘 흉터가 남았다.

중2병에 걸렸을 때는 멋있어 보이는 행동들을 생각 없이 따라 하기도 했고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지려고 노력을 했다. 

예쁜 옷을 입으면 친구들이 나를 좋아해 줄 거라는 생각에 엄마 옷을 몰래 가방에 넣고 학교 가서 갈아입은 적이 많았다. 맞지도 않는 엄마 옷이 내 눈에는 예뻐 보였다.

나쁜 마음으로 그랬던 것이 아닌데 엄마는 오해를 하고 무작정 학교로 찾아와 나를 집에 끌고 가 옷걸이로 손찌검을 하기도 했다. 참 지지고 볶았다.


'엄마랑은 말이 안 통해! 몰라 됐어 말 안 해.'

사춘기 때부터 대학생 되기 전까지 참 많이 했던 이 말.


엄마는 삼 남매를 똑똑하게 키우려고 한국 문학부터 세계문학 전집을 집에 들였다. 

TV 시청은 정해진 1시간 이외에는 금지였다. 볼 수 있는 영상이라곤 인터넷 강의가 전부였다. 

학교에선 유행하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이야기를 할 때면 끼어들 수 없었다.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나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엄마 몰래 인기 있는 프로그램들을 PMP에 다운로드하여서 보든 컴퓨터로 보든 어떻게든 봤다.


엄마 아빠가 집에 안 계실 때면 동생과 나는 잽싸게 숨겨둔 리모컨을 찾아서 마음 졸이며 드라마를 봤다.  

차라리 보게 해 주셨더라면 미련 없이 보고 공부에 집중했을 텐데 못하게 하니까 더욱더 보고 싶었다. 하지 마라고 할수록 청개구리처럼 더 다른 짓을 했다. 

학교를 마치면 학원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술학원이 가기 싫어 한 번 빠졌던 것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었다. 

대신 신나게 자전거를 탔다. 해야 할 것들이 많아 답답했던 마음을 내리막길에서 시원하게 날렸다. 시원한 바람을 타고 자유가 나를 찾아왔다. 즐거운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아 부지런히 페달을 밟으며 온 마을을 누볐다. 


초등학생의 일탈을 만끽하고 집에 돌아갈 때면 죄책감을 가지고 마음을 졸이며 현관문을 열었다.

공부 말고는 할 대화가 없었는지 엄마의 관심은 오로지 공부였다. 하루 중 내가 가졌던 감정에 대해서 묻거나 얘기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말로 느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러서  짜증이 나면 왜 짜증이 났는지 이유를 설명을 잘 못했고 그냥 짜증만 냈다. 

학교에서도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엄마도 화가 났으면 왜 화가 났는지 설명하는 대신 화부터 냈다. 나도 그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중학교 시절 매주 목욕탕을 갈 때마다 엄마와 길게 대화를 하려고 몇 번 시도를 했었다.

대화의 시작은 좋았으나 엄마의 끝없는 걱정과 잔소리로 끝이 나는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대화하는 것을 서서히 멈췄다.

모험심이 강한 내게 엄마의 걱정과 잔소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로 만드는 것 같아 길게 대화를 하지 못했다.

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삭이는 것이 내 성격이 됐고 내 얘기보다는 남 얘기를 듣는 것이 익숙해졌다.

남의 말을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서운한 감정을 갖는 대신 감사하기로 했다.  

당시에는 오은영 선생님 같으신 분들이 많이 없었기에 엄마가 처음인 그녀도 자식의 마음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해 서툴렀다고 생각한다. 

나는 서툰 엄마의 방식을 보고 자란 딸이어서 그런지 표현에 서툰 딸이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있었던 일들을 조잘대는 딸들과 달리 과묵한 딸이었다. 

친구 집에서 자고 싶어도 이유 없이 '안돼'라는 말만 돌아왔고 어떤 말을 해도 '공부해라 책 읽으라'는 말이 돌아오는 것을 알았기에 입을 다무는 편을 선택했다.

여전히 고민이 생겨도 어느 누구에도 말하지 못하는 습관이 생겼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해 괜찮았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사람이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구나를 배웠다.

대신 일기장에 말했다. 서러움에 가득 찬 마음을 토로하는 글도 있었고 나를 위로하는 글들도 있었다. 

폭식증을 심하게 겪을 때는 나를 향해 비난하는 아픈 말들이 일기장에 빼곡하기도 했다. 

속 얘기를 자세히 적어갈수록 제멋대로 엉켜있던 마음은 천천히 제자리로 찾아가 차분해졌다.

  

맞지 않는 엄마의 연분홍색 카디건을 입고 '친구들이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가진 12살 꼬마에게 말을 건넨다.


"엄마는 첫 아이 상실의 슬픔으로 너를 누구보다 잘 키우고 싶었던 마음에 많은 것들을 못하게 했지. 너의 성공을 위해 TV를 보는 대신 책을 많이 읽기를 바라셨어. 

속에 있는 마음들을 말할 곳이 없어서 많이 슬펐지? 

자전거를 타면 슬픔을 날릴 수 있어서 학원을 빼먹었구나. 온 마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하고 싶었던 말들을 했구나.

안돼라는 말을 듣기 싫어 몰래 하곤 했던 너를 꼭 안아줄게."


그리고 엄마에게 전한다.


"엄마,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참 한결같이 자식 걱정을 하고 나와 동생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주려고 해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엄마의 사랑으로부터 온 거 같아. 

그 당시에는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했던 행동들인데 엄마 눈에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여서 우리 많이 싸웠지. 

당시 한 번도 내 마음을 묻지 않았었던 엄마가 미울 때도 있었어. 내게 손찌검을 했을 때는 반항심에 하지 마라는 짓을 더 했고 짜증도 많이 냈어. 

엄마한테 못된 말로 상처를 줬었다면 진심으로 사과할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니 내 감정과 생각을 엄마에게 말한 적이 거의 없어서 엄마가 서운했을 수도 있겠다. 

말하는 것보다 듣기에 익숙한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어. 

걱정하지 마, 내게 일기장이 있으니까 스트레스를 예전보다 받지 않아. 

엄마도 사는 게 힘에 부칠 때 어디에 말할 때가 없어 외로울 때도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 흘러 엄마 나이가 되면 '그때 엄마랑 더 많은 대화를 할걸' 라며 후회는 안 하도록 이제부터라도 내 속마음을 엄마에게 하나둘씩 공유해볼까 해. 

비록 멀리 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연락을 해서 얽히고설켰던 그때의 응어리를 하나둘씩 풀어보자.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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