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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주Ivy Oct 28. 2022

그에 대한 나의 오해를 풀다

캐나다에서 수학이 내게 친구를 만들어 준 고마운 존재지만 나는 수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학이란 말을 들으면 수학 선생님이신 아빠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수학 기호를 볼 때면 어릴 때 수학을 배우면서 혼났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빠는 수학 유전자가 조금이라도 내게 와서 당연히 나도 수학을 어느 정도 할 줄 기대하셨을 것이다.


논제를 파악하고 서론 본론 결론에 맞춰 논리적으로 풀어내야 하는 논술과 달리 수학은 공식을 잘 이해하고 풀면은 딱 떨어지는 답이 나온다.

여러 비유를 통해 함축적 의미가 담긴 단어의 뜻을 유추해내야 하고 주관적인 생각이 개입되는 국어시간과 달리 수학은 한 가지 답이 명쾌하게 나온다. 속 시원하게 통쾌한 느낌을 주는 수학을 좋아하고 싶었다.


수학선생님 딸답게 5살이 되자 아빠는 내게 구구단 암기를 시켰다. 그 당시 아빠를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 9단까지 이틀 만에 외웠다. 어떻게 외웠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공책 한 권이 빼곡할 정도로 썼었던 것은 어렴풋이 생각났다. 이런 나를 보며 역시 내 딸은 수학을 잘할 거라고 기대하셨을 것이다.

유치원 때부터 아빠와 수학 수업을 같이 했다. 여러 분야 중에서 시계 관련 문제에 특히 취약했다.

아빠 입장에서는 어려운 내용이 아닌데 내가 못 풀어내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나보다.

계속 끙끙대자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너무 놀라 눈물부터 났다.

 

"이것도 이해 못 해?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면 이 답이 나오잖아, 다시 해봐!"


미친 듯이 심장이 뛰어 아빠가 하는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고 손발이 오들오들 떨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이 반항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아빠는 "뚝 안 그쳐? 한 대 맞아야 정신 차릴래? 이렇게 쉬운 문제도 못해서 어떻게 나중에 대학 갈래?"


"여보 어린애가 잘 모를 수도 있지, 잘 설명해주면서 천천히 해요."


내가 걱정이 됐는지 엄마는 옆에서 분위기를 바꾸려고 한마디 하셨다.


"다시 해봐! 모르면 뭐가 모르겠는지 물어봐 입뒀다 어디에서 쓸래?"


"다시 설명해주세요..." 모기 기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아빠는 내 방 벽에 붙어있는 시계를 직접 들고 와 손수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제 이해했어? 이 문제 풀어봐"


이해는 했지만 쿵쿵대는 심장이 방해해서 정신이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연습장에 문제를 차근차근 풀었다.

옆에 장승처럼 우두커니 보고 있는 아빠 옆에서 나는 시체처럼 얼굴이 창백해져 답을 떨리는 마음으로 내밀었다. 오답이었다.


퍽 쨍그랑 우당탕


순간 천둥처럼 큰 소리가 내 고막에 꽂혔다. 화가 잔뜩 나 가시처럼 돋친 사납고 쨍한 목소리였다. 그 뒤로 퍽하는 깨지는 소리와 유리 파편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머리가 새하얘졌고 숨이 턱 막혔다.


"몽둥이 어디에 있어 몇 번이고 설명했는데 이걸 틀려?"


나는 순간 극심한 공포를 느껴 엄마 등 뒤로 달려가 숨어 잘못했습니다라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성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잔뜩 화가 난 아빠는 귀청이 떨어져 나가게 소리를 지르셨다.


아빠 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유리 작은 파편 조각이 아빠 눈을 찔러 피가 흘렀던 것이다.


피비린내가 나는 공포의 수학 과외는 종결됐다. 병원에 간 아빠가 잘못될까 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모든 것이 나 때문인 것 같아 나 자신이 싫었고 죄송스러웠다.


그 후로 수학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수학 공식만 보면 피가 흐르는 눈이 계속 생각나 집중이 안됐다. 이 비밀을 아무에게 말하지 못한 채 초등학생이 지나 중학생이 되었다. 

나는 왜 수학을 못하겠다고 수학 공식만 보면 그때의 일이 생각나 집중하기가 어렵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피바람이 다시 불까 봐 말을 못 했을까?

그 기억이 괴로워 마음 한 구석에 묻어두고 꺼내지 않았다.


공포스러웠던 기억은 한 편의 비디오처럼 머릿속에서 늘 재생되었다.

그 당시에는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이 커질까 무서워 시계 사건이 뇌 속을 떠돌아다닐 수 없도록 지우려고 애썼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 나는 수학을 잘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수학적 재능이 없을 수도 있다. 뇌가 논리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무언가가 방해하는 것 같았다. 뇌에 못이 박힌 듯한 아픔과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불안이 몸을 감싸 항상 긴장했다.


아빠는 포기한 듯 내가 수학을 못해도 예전처럼 불같이 화도 내지 않았다. 여느 학원 선생님처럼 개념과 문제 풀이 설명을 하고 수업을 끝내셨다.

한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이 계속 떨어지자 죄송한 마음밖에 안 들었다.

고3 때는 얼른 대학생이 돼서 집을 떠나 성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잘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한다는 관념이 없는 다른 나라에 가서 자유롭고 싶다는 생각도 막연하게 들었다.

술을 마시거나 놀 때도 마음 한 구석에는 취업이라는 놈이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성공을 부추겼다.


자유롭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여행을 가자니 돈이 없었다.

취업 걱정에 스펙도 쌓을 수 있고 해외여행도 동시에 할 수 있는 학교 프로그램들을 찾아 신청했다. 다행히 기회가 주어졌고 아빠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필리핀, 홍콩, 베트남, 태국, 미국, 그리고 캐나다로 매년을 채울 수 있었던 행운을 가졌다. 


자식 셋으로 먹고 살기 빠듯했던 우리 집은 수학 학원비를 아낀다는 명목으로 아빠에게 과외를 받았던 나의 어린 시절, 수학을 못한 이유가 그때의 기억 때문이 아니라 정말 수학에 재능이 없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는 현명한 지도자로서 중요한 선택을 앞뒀을 때 항상 바른 길로 인도해주셨다.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나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모험을 할 때면 용기와 응원을 아낌없이 보내주셨고 배움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셨기에 어떤 일이든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키울 수 있었다.


공포의 기억에 가렸던 그의 수많은 희생과 사랑이 이제야 보인다.

내 마음 구석에 썩어가고 있던 그 기억을 꺼내 사랑으로 안아주고 세상 밖으로 자유롭게 놓아주려고 한다.


'항상 삼 남매를 위해 밤낮 열심히 살아오신 당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곧 맞으실 은퇴도 축하드립니다.

인생은 수학처럼 답이 딱 떨어져 나오지는 않지만 인생 후반기는 아빠가 꿈꿔왔던 세계여행과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찾아 날개를 펼쳐 마음껏 날아가시길 바랍니다. 이번엔 제가 아낌없이 응원하고 지원해드릴게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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