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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綠陰)의 계절

by 미문


다시는 보지 말자는 말이 무색하게 너는 매일 같이 꿈에 나왔다. 꿈속에서의 너는 몸 어딘가에 선명하게 네 이름을 써놓고서 나를 마주했다. 꿈속에서 깨어나도 너인 것을 잊지 말라는 듯이. 꿈에서 깨어나면 어김없이 네 생각이 났다. 너구나. 또 너야. 두 눈을 감고 밀려오는 꿈속의 기억을 곱씹는다. 꿈속에서 네 모습은 대체로 내게 화가 나 있었다. 너와 난 그 안에서 싸우기도 했고, 대화를 하기도 했으며 어딘가를 걷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꿈속의 우리는 항상 그날 이후의 모습이었다. 그날 이전의 모습은 꿈속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부르지 못하는 네 이름은 목구멍 어디쯤에 안착해 있다. 아무리 많은 침이 목구멍을 타고 꼴깍꼴깍 넘어가도 네 이름은 닳지 않는다. 왜 날이 갈수록 선명해질까.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을 여실히 느끼는 여름의 초입이다. 그날을 등지고 보낸 계절을 헤아려본다. 나는 늘 처음이 두려웠다. 한두 번 겪는 여름도 아닌데, 처음 겪는 여름처럼 모든 게 낯설었다. 네 꿈을 꾼 날에는 나는 하는 수 없이 너를 생각했다. 정말 하는 수 없었다.


지난여름에도 입었던 얇은 셔츠를 걸치고서 밖으로 나왔다. 아직 오월인데 오후 두 시에는 기온이 삼십 도까지 올라갔다. 묵직하고 뜨거운 바람이 차분히 불어왔다. 목덜미를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 때문인지 몸에 열이 올랐다. 곳곳에는 햇빛이 내려앉아 있었고 햇빛이 만들어낸 그림자의 모양새는 다양했다. 제각각 모양의 나뭇잎은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고 그 사이사이로 빛이 비처럼 가느다랗게 쏟아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더워진 날씨 탓에 사람들의 손에는 얇은 외투가 쥐어져 있었다. 산책 나온 강아지들은 입을 벌리고 기다란 혓바닥을 늘어놓았다. 꼭 그 모습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평일 한낮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익숙한 골목을 걸으며 언젠가의 기억이 잔잔하게 밀려왔다. 도대체 이 수많고, 사소한 기억들은 어떻게 저장되는 걸까. 아주 찰나, 눈을 감았다가 뜨는 그 순간에 그 기억은 선명하고 아주 짧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목구멍 어딘가에 콱 박혀 맴도는 네 이름처럼, 너와의 기억도 내 머릿속 어딘가에 아주 깊고, 단단하게 박힌 듯했다.


이토록 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하면 너는 뭐라고 할까. 좀 징그럽다고 할까. 나는 나를 정의 내리는 사람이 싫었는데, 네가 말해주는 내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고 해야 할까. 나라는 사람을 구석구석 살펴봐주고 너는 이런 사람이니까, 하고 조심해 주는 네 모습이 좋았다. 나는 여전히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너를 보내고 난 후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사람이란 알아갈수록 너무도 다양해서 감을 잡을 수 없다. 그게 설령 나일지라도. 어제는 당근을 못 먹었다가 오늘은 당근을 맛있게 먹는 법을 알아가는 게 사람인 것 같다. 이중적인 걸까, 다양한 걸까. 결국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말에 닿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덜 괴로웠다. 그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다. 이해하기 힘들면 굳이 이해를 하지 않고 그렇구나 하고 내버려 둘 수도 있어야 한다. 콱 박힌 네 이름 옆에 그 말을 조금씩 늘어놓았다.


머리를 말리다가, 거리를 걷다가, 너와 비슷한 사람을 보거나, 불현듯 떠오른 기억 속에 네가 있거나, 오늘처럼 꿈속에서 네 모습을 보는 날이면 네게 묻고 싶다. 잘 지내냐고. 입 속에서 내내 맴돌다 부서진 인사는 소화되지 않고 네 이름 옆을 맴돈다. 삼켜진 말들을 손으로 헤아려본다. 무수한 여름 중 하나일 뿐인 오늘을, 나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네가 있기도 했고, 없기도 했던 여름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온다. 어떤 일도 마음의 준비 없이 벌어진다는 걸, 나는 아직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잘 지내냐는 질문은 하지 못하더라도 잘 지내라는 말은 하고 싶다. 잘 지내. 그 말을 끝내 못한 게 마음에 걸려 꿈에 매일 같이 네가 찾아오는 걸까. 속상하고 아쉬운 마음은 그 마음대로, 어쩔 수 없는 순간에는 그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도 있고, 그런 말도 있는 거다.


수신인이 없는 이 글에서라도 네게 안부를 묻는다. 잘 지내, 나도 잘 지낼게. 둥둥 떠다니는 말을 네가 자주 걸어 다니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어둘게. 녹음이 짙어진 이 계절이 저무는 날엔 그 말도 조금씩 희미해지겠지. 자연스럽게 소멸될 이 마음을 언젠가는 기쁜 마음으로 찾아보는 날도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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