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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방식

by 미문

눅눅한 바람을 뒤꿈치에 매달고서 여름을 걷는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에 가만히 집중하고 있으면 여름의 냄새가 맡아져 왔다. 나뭇잎에 고인 바람의 냄새가 코 끝을 스친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서 잠시 숨을 멈추었다. 목구멍에 공기가 가득 차면 참아왔던 숨을 내쉬었다. 더위에 빨갛게 익은 얼굴 덕에 누구도 내가 숨을 참았는지 알지 못했다.

드문드문, 발끝에 고이는 이름을 툭—툭 밀어낸다. 저만치도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이름은, 가만히 누워 나를 바라본다. 입이라도 달려 있다면 무어라 말을 걸 것만 같다. 입이 생기기 전에, 다시 툭 이름을 멀리 보낸다 발끝에서 흐려진 마음들이 되살아난다.

백 번의 여름, 백 번의 초록, 백 번의 이름, 백만 번의 기억. 수없이 늘어난 동그라미에 빗금을 그었다. 이제 앞으로 몇 번의 여름이 남았을까.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이 여름 속에서 나의 온도를 잰다. 여름을 많이 타는 사람과 여름을 걸으면 어느 때보다 차분했고, 여름을 타지 않는 사람과 걸을 때는 그 사람의 더위까지 내가 끌어안은 듯 더웠다 그렇게, 그런 식으로 저물어갔던 여름들.

서로가 서로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해 여름, 우리에게 주었던 마지막 여름휴가는 바다였다. 파랗다 못해 시린 바다를 보며 눈물을 흘렸고 나는 끝내 눈물을 모른 척했다. 지글거리는 모래사장 위로 발자국을 찍으며 파도가 밀려오는 곳까지 내려갔다. 앞서 나간 발자국을 따라, 언제나 두어 걸음은 빠른 너의 걸음을 쫓아 밑으로 내려갔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외롭지 않았던 건 결국 맞춰진 발자국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뜨겁다 못해 과열되었던 그 여름은 이젠 어떤 온도도 남아 있지 않다. 손을 대기 조차 두려웠던 기억은 차츰 제자리를 찾아갔다. 늦기도 했고 빠르기도 한 이 순간을 누구의 탓으로 돌릴까.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쏟아지는 여름밤, 죽고 싶어 환장했던 밤을 잊지 않는다. 이대로 영영 사라지길 간절히 기도했던 바람이 끝내 이뤄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 마음을 오래 끌어안고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덕분에 살았다고.

없어서 안될 것 같던 시간도, 영원할 것 같던 고통도 차츰 사라져 간다. 한 달 앞선 이 여름의 속도를 맞출 순 없어도 나뭇잎에 고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렇게 여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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