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않으면 손가락은 굳어갔다. 휘청이던 밤에는 오래된 편지지를 꺼내고 볼펜을 쥐었다. 몇 줄 쓰다가 쓰기를 멈추고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짤막하게 써 내려간 안부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을 떠도는 문장들은 결국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로 사라졌다. 편지지 옆에 내려둔 볼펜은 어느새 기능을 상실했다. 결국 편지에는 잘 지내냐는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다 하지 못한 채 접어 책과 책 사이에 깊게 꽂아 두었다.
흘러가는 초침 위에 앉아 가을을 누렸다.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가을 지나왔다. 어느 가을엔 발 밑에서 바스러지는 낙엽의 소리가 가을의 비명 같다고도 썼다. 아주 오래된 일기를 들여다보며 저 밑에 눌러놓은 감정을 들여다봤다. 이제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그저 어렴풋이 짐작할 뿐.
흘러가는 가을 속에서 있노라면, 점점 멀어져 가는 건 기억이었고, 기억 속 머무른 장면이었고, 그 장면 속 흘러나오는 목소리였다. 당연함과 익숙함 사이에서 오랜 착각을 이어왔다. 당연한 건 당연하게 여겨야지만 성립된다. 내 피부와 같고, 내가 당장 바라보는 풍경과 같고,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은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당연하다고 여기진 않았다.
지나가는 기억들을 애써 부여잡고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어느 날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워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허벅지에 뚝뚝 떨어졌다. 기억들이 그랬다, 떠오른 장면들이 그랬다.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이 아닌, 마른하늘에 내리는 소낙비였다. 너 자신을 잘 돌 봐줘, 웅웅 맴도는 말의 의미는 여전히 알지 못한 채 눈물이 마르고 비가 그친다.
기억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지금쯤이지 않을까. 이제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울지 않는다.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빈 화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깜빡이는 커서에 맞춰 눈을 깜빡이다 이내 창을 닫기를 반복했다. 지나온 모든 장면에 눈인사를 하듯, 그 시간들을 보내고서야 글을 쓴다.
무심코 떠오르는 장면들과, 부르지 않을 이름, 만지지 못할 얼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옴에 따라 흐려지고 흩어진다. 오래 응어리졌던 마음은 어느새 산산이 부서져, 너를 이해하지도 나를 이해하지 않아도 서로에겐 최선이었음을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