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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Jun Oct 26. 2022

제3장: 삶을 증명하는 사실 (4)

삶을 증명하는 분명한 사실들과 순환의 의미

기본적으로 저의 삶은 부모님을 비롯한 타인들의 도움을 필연하여 존재하는 만큼 타인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타인의 삶으로부터 탄생된 나의 삶은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서로 생각을 공유하고, 의지하고, 도움과 상처를 주고받게 되는데, 이 과정을 거쳐 스스로의 삶을 타인의 삶을 통해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서로의 상호작용으로 삶을 인지하고 정의하는 만큼 사람들은 분명 신체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지만 삶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서로가 일부를 공유하면서 하나의 삶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류의 삶은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삶을 더욱 많은 사실들을 통해 빠르게 알아갈 수 있는데 수많은 삶들의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약한 신체로 인한 협력의 중요성에 따라 발달된 두뇌는 보다 효율적인 삶의 유지와 성장, 그리고 사랑을 위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이 기록들은 그 사람의 삶이 분명히 생각하고 느꼈던 사실로서 인류의 삶을 정의했는데 이렇게 정의된 삶을 기반으로 사람들을 끊임없이 더 강력한 유지와 성장을 할 수 있는 삶을 만들어 왔습니다. 사람의 삶이 매번 처음부터 다시 정의되는 것이 아닌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삶의 정보들이 축적되면서 더 많은 사실(삶의 정의하는)과 함께 더욱 빠르고 강하게 삶을 유지,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지금 저의 삶은 지금 같이 살고 있지 않더라도 과거 수많은 타인들의 이야기(삶)를 통해 후회와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지금까지 이어져 나의 일부로서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죽은 사람의 삶도 기록을 통해 지금 나와 함께 삶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형체(신체)가 없다 하더라도 상호작용이 있으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형태를 잃고 지금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준다면 다른 형태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과거의 어떤 영향(힘)이 지금껏 이어져와 지금 다양한 모습으로 관찰(탐지)이 된다면 그것은 지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형태가 달라졌을 뿐 움직임에 따른 영향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과거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받아 지금의 내가 다른 존재와 어떤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면 과거의 삶은 나라는 존재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그들과 삶을 공유하는 것으로서 나의 삶은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수많은 타인과 함께 공유하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서로 다른 과거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생각하고 창조하고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 덕분에 최소한 ‘나’라는 생명이자 삶은 지금껏 어떤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채로 이런 글을 쓰거나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여 나눠주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삶들이 지금까지 기록되면서 이어져 왔기에 초기 언제 어디서든지 쉽게 죽을 수 있었던 사람의 삶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끊임없이 과거보다 더욱 강하게 유지 성장할 수 있는 형태(공간/상황)와 움직임(시간)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즉, 나의 삶은 많은 부분을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수많은 타인의 삶과 다양한 형태와 움직임으로서 공유하고 있으며 삶을 정의하는 사실의 축적으로 끊임없이 유지와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타인과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을 공유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지키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목표와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노력은 더욱 분명한 사실로서 내 삶을 더 풍족하게,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희생 덕분에 죽음의 위협 없이 나의 행복을 생각할 수 있는 나의 삶,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았던 비참하고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보다 타인을 지키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서 가치와 가능성이 증명된 나의 삶,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려가며 더 나은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의 삶을 지금의 내가 마음대로 단정할 수 있는 걸까요?


지금의 내가 아닌 앞으로의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행복을 꿈꾸면서 피, 땀, 눈물을 흘린 삶, 지금도 더 나은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삶을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해서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코 원인에 따라 일방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무한한 가치와 가능성이 입증된 삶으로서 존재하는 지금 나의 삶을 온전히 나의 것이라 판단하여 나 하나 편하자고 내 맘대로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걸까요? 분명히 존재하고 지금도 입증되고 있는 사실들을 무시한 채 지금 내 맘대로 삶을 정의한다면 그 삶은 인류의 삶과 함께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을까요?


삶은 지금의 나로서 존재하지만 이 삶을 정의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위의 답은 불가능이 됩니다. 삶은 단순히 시간상의 지금이 아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 되어 이루는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류의 삶은 기록을 통해 매우 긴 시간 동안 지금(과거, 현재, 미래)을 이뤄왔기에 끊임없이 유지와 성장을 이루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지금 똑같이 자연적 특징과 동물적 본능을 갖고 있는 다른 동물들의 삶과 사람의 삶이 다른 이유가 됩니다.


우리의 삶은 다른 동물들의 삶과는 다르게 지식을 통해 성장과 유지를 다음 삶으로 거의 온전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저는 지식을 통해 인류의 삶이 겪었던 경험과 감정, 생각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그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삶의 유용한 지식을 알 고 있으며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저의 삶이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거쳐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식을 통해 알고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들을 바탕으로 더 많은 지식들을 탐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나의 삶은 곧 인류의 삶으로서 정의됨과 동시에 자연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 또한 마찬가지로서 각 동물들의 삶과 함께 자연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각 동물들은 신체적 한계로 인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각각의 삶이 온전히 지식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거의 매번 새롭게 시작하게 됩니다.


이는 자연적 특징을 가진 삶에 따라 동물마다 가지고 있는 삶이라는 자연이 더 오랜 시간 동안 성장과 유지를 이어갈 시간에 차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하고 거대한 생태계를 형성한다는 사실에 따라 삶은 다른 (동물들의) 삶과는 다르게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형태와 움직임을 더욱 크고 강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모두 지식으로서 가능한 것이며 이 지식을 형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생각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능력은 곧 상상력으로서 인류의 삶은 동물의 삶보다 강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음으로 구분되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삶은 상상함으로써 존재하며 상상할 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상상을 통해 우리의 삶은 다른 동물의 삶 대비 훨씬 더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기에 더욱 강하게(다른 동물보다 이 세상에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에서 상상함으로써 지금 내가 할 수 있거나, 해야 하거나, 하고 싶은 경우의 수에 대해 선택할 수 있으며 대비(준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동물들은 사람처럼 상상력이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상황에 따라 동물적인 본능에 크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 자신만의 안위와 욕망을 위해 인권을 유린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됩니다. 만약 초기 인류에게 현재의 범죄들은 일상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그 당시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약육강식의 본능적 형태와 움직임으로서 정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의 삶은 상상력을 통한 지식으로 인해 과거의 삶과는 확실히 다른 형태와 움직임을 가지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더 크고 강력한 삶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람들은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지금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통해 알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과거보다 훨씬 더 나은(강한) 삶을 살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러한 삶은 곧 인권이라는 일종의 합의된 삶의 정의로서 존재하는 만큼 이 인권에 위배되는 삶은 현 인류의 삶에게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지금의 삶을 과거의 삶으로 퇴보(쇠퇴와 분열)시키는 것으로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인 자연의 특징에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류의 삶은 분명 사실로서 존재하는 지식(상상력)을 통해 존재하는 만큼 지금의 사람들이 인류의 삶에 대해 충분히 알고 끊임없이 지식을 탐구하고 쌓을 때(상상할 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만약 당장 태어난 사람부터 그 어떤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삶을 공유하고 이어 나갈 타인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동안 유지되고 발전된 인류의 삶(자연)은 존재하지 않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류의 삶에게 있어서 (지식, 상상력을 매개하는) 교육과 타인이라는 존재가 매우 근본적인 시스템으로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교육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6장에서)



*상상력은 삶에게 있어서 끊임없이 자연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축적되는 지식과 함께 상상을 매개하는 뇌의 형태와 움직임은 자연의 모습을 의미하는 순환 그 자체를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순환의 형태와 움직임을 담아내는 우주의 형태와 움직임에 따라 뇌가 생물학적으로 형성될 것임을 의미하며 실제로 뇌와 우주의 형태와 움직임은 서로 매우 비슷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4장에서)



정리하면 지금 나의 삶은 과거부터 이어져온 수많은 타인과 함께 과거, 현재, 미래를 공유하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기반으로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목표를 잡아 살면서 끊임없이 삶을 증명하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삶은 시간의 흐름상 과거부터 이어져 미래로 나아가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과거/현재/미래의 삶들은 결국 지금 존재하는 삶으로 정의되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과거가 현재의 삶을 존재하게 하듯이 과거로 존재하는 현재의 삶은 미래의 삶을 존재하게 하는 것으로서 삶은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의 삶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생각과 결정이 삶을 정의하면서도 지금 나의 삶을 존재하게 하는 삶의 형태와 움직임에 나의 생각과 결정(삶)이 위배된다면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즉, 삶에게 있어서 ‘나’는 과거부터 미래까지 이어진 타인과 함께 삶을 정의할 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지금 나의 삶은 타인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 내가 존재하는 공간(상황)과 하나 되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우주와 자연을 통해 바라본 삶의 모습과 같다는 점에서 사람에게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라는 것은 현실과 이론을 아우르는 진실이 됩니다. 모든 삶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여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으로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완벽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순환에 따라 모든 존재는 어떤 매개를 통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증명하고 정의하여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에 부합됩니다. 자신의 삶은 본인이 정의하고 결정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 삶은 타인의 삶을 필연한다는 점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타인들의 삶과 사랑이라는 매개로 연결되어 지금 나의 삶이라는 하나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는 삶이란 곧 순환으로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과거, 현재, 미래를 모든 순간들이 전부 증명할 수 있는 관계로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삶이 순환이라면 순환의 특징에 따라 나의 삶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형태와 움직임을 확률적/실체적 시공간의 중첩으로서 존재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이라는 실체를 기준으로 확률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 확률은 실체와 함께 서로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증명(영향을 미친다)함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삶은 과거/현재/미래를 아울러 모든 존재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삶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과거의 삶에 비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이런 변화는 왜 발생되었는지, 삶은 왜 존재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나의 삶을 증명하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한 사실과 존재에 대한 그 어떤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음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서 순환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채 그저 표면상, 시간을 사용하기 쉽게 나눠서 정의한 과거/미래/현재에 따라 분리된 개념으로 판단하였고, 부정했고, 타협했습니다. 그리고 분명 지금을 기준으로 과거, 미래, 현재는 다르고, 이 사이에 있는 시간적 공백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므로 최대한 과거를 받아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을 알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최선이자 더 나은 삶을 향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끊임없이 더 강하게 유지되고 성장하려는 사람(삶)은 결코 자신에게 불편함을 주는 요인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계속해서 무력감과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아무리 과거를 부정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해도 그런 과거를 가진 지금의 내가 느끼는 끊임없는 슬픔과 고통은 지금 어떻게 할 수 없는 과거에 의한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도 느껴지는 끊임없는 막연함과 두려움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미래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표면적으로 쉽게 분리해서 정의하고, 불확실한 정보를 주관적으로 판단하여 지금의 삶을 정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은 삶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잘못된 모순적 삶으로서 전혀 해결할 수 없는 미래와 과거, 현재, 상황에 대해 끊임없는 스트레스로 고통받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미래, 현재가 순환하여 지금이라는 하나를 이루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임에도 이 사실을 부정한 채 분리하여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기 때문에 끊임없는 악순환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부정하고 타협했던 삶은 불가항력에 맞서는 삶이었기 때문에 속도와 길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결국은 같은 악순환에 빠졌던 것입니다.


순환에 따라 지금 나의 삶은 주관과 불확실성만이 존재하는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내가, 그리고 타인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지금 이 순간 내가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는지에 따라 삶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의 삶은 타인의 삶과 함께 모든 삶의 형태와 움직임을 증명하기에 나를 포함한 타인의 삶은 그 어떤 존재로부터 단정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생각하고 결정하면서 하나로서 정의되고, 증명되는 것입니다. 전체가 하나를 증명함과 동시에 하나가 전체를 증명하며, 모든 과정(과거, 현재, 미래)이 그 어떤 기준 없이 모든 순간에 중첩되어 존재하는 것이 순환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나의 생각과 결정이 삶을 증명함과 동시에 결정할 때 비로소 삶은 살아있는 나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바로 타인과 함께 나의 삶이 과거, 미래, 현재가 지금이라는 하나로서 존재한다는 진실을 언제든지 증명 가능한 우주와 자연의 순환을 통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삶이 됩니다.


비유를 통해 삶을 보면 연극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연극의 주연이 본인이라고 해서 그 연극을 이루는 모든 것(관중 포함)들이 자신의 것이 아닌 상황에서 본인은 ‘내 삶’이라는 이름을 가진 연극의 주연으로서 이 연극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만의 삶을 연극으로 소화하는 수많은 조연들(각자의 삶에서는 주연들, 혹은 사랑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주연을 같이)과 함께 더 흥미롭고 풍족한 연극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연극의 목적과 방향을 정하는 것은 혼자가 아니며 준비하고 실행하고 꿈꾸는 것도 혼자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혼자 하는 연극을 포함한 모든 연극은 관객을 필연하며 관객들이 흥미 있을 만한 스토리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받기에 결코 연극은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흥미 있을 만한 주연(각자)의 스토리가 아닌 너무나도 뻔하고 지루한 주연 없는(주체적인 스토리가 없는) 연극을 만든다면, 너무나도 뻔한 스토리(원인에 따라 결과가 정해진)를 담아낸다면 어떤 사람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며 이 연극은 결국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관객이 없는 연극은 성립이 불가능한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삶이라는 연극은 과거부터 수차례 다양한 이야기와 기술로서 그 한계를 돌파했고 모든 과정이 굉장히 아름답고 경이로웠기에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가는 것입니다. 또한, 항상 어떤 이야기와 볼거리로 삶에 영감을 불어넣어 줄지 확신할 수 없고 궁금하기 때문에 보러 간다는 점에서 삶이라는 연극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을 때 보다 크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즉, 삶이라는 연극을 한다는 것은 연극의 존재이자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예측할 수 없는(원인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닌 주체적인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며 연출과 스토리로 이를 증명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관건은 이러한 연극을 어떻게 삶으로서 존재하게 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나의 삶’이라는 연극의 주연으로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함께 연극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요? 나는 내 삶의 주체로서 타인과 함께 삶(연극)을 존재하게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형태와 움직임을 가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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