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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Jun Oct 26. 2022

제3장: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3)

삶을 이루고, 증명하고, 정의하는 가장 근본적인 존재들에 관해

저는 위와 같은 경험을 통해 ‘나의 삶’이라는 것은 내가 확신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필요하며, 이 기준은 삶의 모든 순간 즉, 삶 그 자체에 적용 가능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 그 자체에 적용 가능해야 한다는 것은 삶의 정의에 부합되어 존재한다는 것으로 나의 삶이란 곧 삶에 대한 근본적이고 객관적인 정의와 그에 따른 기준이 삶을 통해 증명될 때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반대로 자신의 삶이 삶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정의를 증명하지 못하거나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삶은 분명 살아있는 신체를 통한 생각으로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모순이 됨을 의미합니다. 즉, 분명 지금 나는 나의 의지와 생각에 따라 움직이고 느껴지는 신체와 함께 살아있음을 느끼면서 삶을 살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이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거나 잘못 정의 내린다면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수많은 주관적/상대적 정의에 따라 모순이 발생되면서 결국 혼란과 고통, 불행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비유를 들자면 바다 위에 떠 있는 아주 작은 모래섬에 표류한 사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바다와 모래섬이 어떤 특징을 갖고 같이 형성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매번 다른 형태와 움직임으로 다가오는 파도와 날씨는 매우 두렵고 혼란스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매번 불어닥치는 파도와 바람, 비, 태풍 등으로 인해 바다로 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모래의 움직임을 본 사람은 끊임없이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모래가 바다로 쓸려 내려가는 것을 막고자 애를 쓸 수는 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자연의 법칙에 저항하는 것으로서 불가항력에 맞서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사람은 지쳐 포기하게 되고 끝없는 절망과 슬픔에 빠지는 것입니다. 처한 상황과 삶(육체와 정신)은 하나로 존재하므로 점점 약해져 가는 정신과 육체 속에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은 정말 이대로 죽는 것인지, 배라도 만들어야 하는지, 배를 만든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나는 어쩌다가 지금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 계속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의문은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확실하게 믿을 만한 그 어떤 답도 알거나 결정지을 수 없다는 점에서 끝도 없이 혼란, 의문, 절망만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결정짓지 못한 채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흔들리면서 끊임없이 불행한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사람이 최소한 작은 모래섬과 이 바다가 각각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 알고 있다면 현실을 보다 빠르게 판단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이 이 상황에서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은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됨으로써 상황을 어떻게 인지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사실로부터 결과적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절망과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혼란과 절망, 슬픔은 끝도 없는 혼란과 절망, 슬픔이 아닌 상황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여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계속해서 의문을 던지고 혼란에 빠지는 것이 아닌 사실을 기준으로 마음을 다잡고, 내 상황과 함께 나의 생각과 결정, 행동(삶)을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결정은 객관적인 사실에 따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경우의 삶 중 자신이 주체적으로 하나의 삶을 선택한 것으로서 내가 결정한 나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즉,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고, 이를 통해 지금을 알고 결정지을 수 있다면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과 생각들이 결과적으로 그 사람의 삶에게 있어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서 분명한 가치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결정짓는 과정은 객관적인 사실을 고려한 것으로서 보다 확실하게 결정되고 이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위에서 자신의 삶과 하나로 존재했던 상황에서 어떤 것도 알지 못했던 사람도 잠시 멈춰 지금까지 자신이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실들을 생각하고 지금 나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낸다면 최소한 끊임없는 의문과 혼란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살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사실을 알아내고 추구하는 삶은 끊임없는 혼란과 절망, 슬픔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이 아니라 주어진 객관적인 사실 속에서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확실한 사실을 기반으로 나의 삶을 생각하고 결정짓는 것으로서 변화되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확신하는 목표와 기준을 잡고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의 삶’인 것입니다. 이는 삶 그 자체를 객관적인 사실로서 알고 정의 내릴 수 있다면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준과 함께 절대적인 믿음으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이루고 싶은, 이루어야 하는 목표를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보다 뚜렷하고 강하게 나의 삶을 알고, 결정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사람의 주관이 들어갈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만으로 구성된 삶의 정의를 찾고자 과학적 고찰에 준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사람들이 모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우주와 자연의 모습뿐이기에, 이를 기반으로 한 삶과 삶의 가치만이 나를 포함해 누구나 확실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철학과 신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절대적인 사실에 입각한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한 생명의 신체부터 우주의 모습까지의 공통된 형태와 움직임을 알고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바로 순환이었습니다. 이는 지금 살아있는 신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사람의 삶과 이러한 삶들이 모여 있는 사회 또한 하나의 순환을 이루는 형태와 움직임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순환이 제시해 주는 삶의 시간(과거, 현재, 미래), 공간(상황)과는 다르게 과거, 현재, 미래, 공간을 분리해서 살아온 저는 원하는 ‘나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즉, 어떤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그 존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과 이에 따른 사실은 스스로가 납득하면서 확신할 수 있는 생각과 기준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토대로 이해한 삶에 주관적인 생각과 기준에 의해 흔들릴 공간과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삶의 과정과 순간은 나의 삶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반면 근본적인 의문과 정의 이전에 이루어지는 질문과 이에 따른 답은 결과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며,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결코 어떤 확실한 기준과 생각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타인을 이롭게 해 준 사람들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목표를 이룬 사람들에 대해서 던진 질문에 문제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아름답고 경이롭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확실한 정답이 아닌 사실상 주관적으로 판단한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질문을 던진 대상 자체가 지금의 내가 절대적인 사실로서 확신할 수 없는 주관적인 사람으로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제가 생각했던 공통점과 실제로 부합하는지 결코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당사자가 본인의 입으로 말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실제로 그 당시에 그런 생각과 의도, 각오를 가지고 목표를 세우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부조리(혹은 부조리라고 생각될 수 있는,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도 없이 끝까지 노력했는지는 결코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 대한 공통적인(공통적이라고 판단되는) 특징이 삶의 정의할 수 있는 답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삶과 함께 자신의 삶에 대해 오해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는 것이며 이러한 질문은 결코 확실한(객관적인 사실을 통해 확정된) 정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마치 1,2,3차원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당장 눈에 보이는 모습만을 가지고 섣부르게 4차원에 대해 일반화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최소한 객관적인 사실로서 존재하는 각 차원 간의 공통된 모습을 통해 확실한 차원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을 정립한 후에 4차원을 봐야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정보와 함께 4차원을 정의,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질문은 스스로 확정할 수 있는 사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을 돕거나 자신의 목표를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런 그들의 모습에서 아름답고 경이로움을 느낀 것도 분명한 사실이므로 사실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이끌어낼 질문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본인도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혹은 여타 사람들처럼 자신만의 안위와 욕심 만을 위해 편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희생하면서까지 사람들을 돕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름답고 경이로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그들의 목표는 타인과 깊이 있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신념과 목표에는 본인의 이익도 있지만 언제나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공동체의 이익도 같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공동체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친구, 가족, 조직, 사회, 국가, 인류까지 다양하며 그들의 목표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평화와 안녕을 원하거나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각자만의 스타일로) 계획하고 이행했으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이러한 목표와 행동 덕분에 공동체 사람들은 크고 작은 도움을 받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 쓰기도 버거운 상황에서도 타인을 돕는 그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람에 대한 믿음을 줍니다. 이 믿음을 통해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혼자일 때보다 다 같이 함께 할 때 더 많은 것들을 이뤄낼 수 있기에 이러한 믿음은 상황에 따라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이 상황을 이겨내고 행복한(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가지게끔 합니다. 주체적으로 상황에 따른 삶을 결정하는 것으로 이겨내거나 적응하게 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희망과 용기를 통해 인류의 삶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상황을 변화시켜 나갔으며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삶은 사람들 마음속에 끊임없이 깊은 따뜻함과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이들의 삶을 존경하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있어 온 것입니다. 이들의 삶을 몰랐다고 해도 이들과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계속해서 있었던 것이며 그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삶은 다양한 형태(사람, 이야기 등)로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지금 우리는 분명하게 과거보다 훨씬 살기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인류의 삶은 더 풍족하고 강한 삶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항상 존재했던 수많은 타인들처럼 그저 상황에 따라 휘둘리고, 편하게 남 탓하고, 자신만의 안위와 권력,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공동체를 위해 용기 있게 나서고 싸웠던 사람들이 있어 왔기에,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삶이 멋있고 존경스러워 보였기에 우리 인류는 점차적으로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자신보다도 타인을 위하는 생각과 행동을 했던 것일까요? 여기서 타인을 위하는 생각과 행동은 기본적으로 자신보다도 타인을 먼저 생각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자신이 아닌 타인을 걱정하나요? 여러분은 언제 나의 바람과 행복이 아니라 타인의 바람과 행복을 생각하나요? 여러분은 언제 자신보다도 타인을 보고 싶고 그리워하나요?


우리는 누군가(혹은 무엇인가)를 사랑할 때 비로소 나만의 안위와 욕망이 아닌 타인(다른 존재)의 안위와 욕망을 생각합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애당초 관심이 없거나 타인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과 안위를 채우려 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타인은 결과적으로 고통받을 것입니다. 즉, 지금 우리의 삶은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지금의 상황으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사랑을 믿고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강력하고 분명한 감정과 생각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한들 이 사랑을 기준으로 삶을 결정하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먼 과거 약한 신체를 가진 채 수많은 짐승과 척박한 환경 속에서 매 순간 죽음의 두려움에 떨었던 사람의 삶은 그저 상황에 휘둘리면서 당황하고 절망하면서 결국 죽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자신만의 뚜렷한 목표와 기준을 가지고 삶을 살면서 계속 존재하게 한 것입니다. 즉, 사랑은 삶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로서 삶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삶 또한, 사랑을 존재하게 한다는 점에서 사랑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삶이 있고, 삶이 있기에 사랑이 있는 것으로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삶은 곧 삶을 증명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로서, 실제로 동물들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끊임없이 사랑을 구걸하고, 사랑하고, 사랑을 지키고, 희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언제나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 삶들을 지키고 더욱 다양한 삶들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자연의 모습에 부합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돕겠다는 각오와 신념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생명을 지키고 창조하고 끊임없이 더 다양하고 많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자연의 모습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즉, 이들의 모습은 자연의 섭리(근본적인 규칙이자 사실)에 부합했기에 우리가 자연을 보면서 느끼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본능적으로 이들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자연을 보면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아름다움 또한, 서로를 언제나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과 같은 자연의 모습에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생명은 자연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삶은 자연의 특징을 갖는 것이며 그 특징이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는 사랑이 어떤 동물적 본능보다도 더 근본적인 존재로서 사랑은 삶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그 어떤 본능보다도 강하게 작용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을 비롯한 동물들은 사랑을 위해서 본능을 이겨내고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합니다. 그만큼 사랑은 삶에서 바라보는 자연과 같이 강력한 믿음으로써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함께 인류의 삶은 사랑으로서 끊임없이 더 많은 삶과 함께 더욱 강하고 찬란한 문명(공동체)을 꽃피워 온 것입니다.


여기서 인류의 삶이란 곧 한 사람의 삶과 같은 것으로서 사람의 삶 또한, 사랑으로서 더욱 강해지고 찬란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삶은 자연의 모습처럼 아름답고, 소중하고, 고맙고, 그립고, 미안하고, 지켜주고 싶은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순환의 특징에 따라 사람의 삶은 사랑했기 때문에 존재하고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며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삶은 곧 사랑이며 사랑으로 하여금 삶은 그 의미를 갖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자연은 전체적인 삶들의 유지와 조화, 성장을 이루기에 자연의 모습과 일치되는 삶은 수많은 삶들에게 자연과 같은 존재로서 고맙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안위와 행복만을 위해 무책임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삶은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삶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삶 즉, 불행한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타인과 함께 하나의 사회를 이루면서 존재하는 나의 삶은 동물적 본능과 자연적 특징으로서 어떻게 여타 다른 동물들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사랑이 삶이고 삶이 사랑이라면 사랑과 삶은 각각 무엇이며 하나로서 어떤 형태와 움직임을 가지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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