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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Jun Oct 26. 2022

제3장: 주관에 따른 분열/분리 그리고 그런 삶 (2)

순환의 부재 /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나의 삶 그리고 악순환


당장 스스로에 대해 어떤 확신도 할 수 없었던 저는 그동안 피하기만 급급했던 과거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더 이상 후회할 과거를 안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잘했던 점, 못했던 점을 생각해 보면서 나의 장단점을 알려고 했으며 어떻게 하면 과거와 같은 잘못과 실수, 그리고 후회를 안 할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이때 본인에 대한 확실한 기준과 확신(내가 어떤 사람인지, 옳고 그름의 기준 등)이 없었던 저는 타인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고 했으며 최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얻고자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의 얘기와 나의 생각을 통해 지금 나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생각 얻을 수 있었고 과거를 통해 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항상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 하나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타인이 말하는 내 모습이 정말 객관적인 나의 모습이 맞는지에 관한 의심이 있었는데 사람마다 저에 대한 평가와 그 근거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들으면서도 스스로 생각한 나의 모습과 비교해 봤지만 문제는 스스로조차 자신이 누구인지 단정하지 하기 때문에 타인의 의견을 들으려고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평가는 추상적이고 단순했습니다. ‘착한 것 같아’, ‘저런 걸 잘하는 것 같아’, ‘이런 걸 못하는 것 같아’, ‘좀 성급한 것 같아’, ‘배려심이 많은 것 같아’, ‘이런 걸 좋아하는 것 같아’, ‘저런 걸 싫어하는 것 같아’, ‘조금 이기적인 것 같아’ 등과 같은 답변들인데 추상적인 만큼 이 답변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근거가 달랐습니다. 그중에는 구체적인 상황과 함께 저의 언행에 대해 논리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또한 저의 생각과 다르거나 같은 내용에서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 저에게 어떤 상황에 대한 잘못을 얘기해 줬을 때 그 잘못에 대한 이유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각자의 관점에 차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이유를 고려했을 때 문제가 될 수 있었지만 저와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추상적인 만큼 과거에 그렇지 않은 모습과 함께 관점에 따라 변화되는 결과와 근거들이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서 좀 성급한 것 같다는 말과 이유를 들으면 개인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거나 같은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경우와 이유도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보는 관점에 따라서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와 관찰자, 책임자와 비책임자 등이 바뀔 수 있었으며 그 범위와 정도도 달라졌습니다. 이는 저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이 가진 저에 대한 기억이 물리적으로 완벽할 수 없으면서도 각자만의 주관적인 생각을 거쳐 변질된 상태가 됨을 의미합니다. 즉, 과거를 통해 보는 나의 모습은 부분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끊임없이 대부분의 이야기와 생각을 추상적이고 단순한 결론으로 귀결시키도록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이 하는 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나보다 나에 대해 모를 수밖에 없는 타인이 자기 마음대로 나에 대해 평가한다는 사실에 따라 괴리감을 느끼게 했고 기분을 안 좋게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타인이 나에 대해 평가하는 기준이 정말 객관적으로 옳은 기준이 맞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나의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정작 본인(타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 않은 데 그런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는 것에 대해 불쾌한 의아함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분과 생각은 사람들의 평가는 물론 평가를 내렸던 사람에 대해서도 주관적인 기준을 갖게 끔 만들었고 평가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 혼란스러움을 가중시켰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람, 상황마다 달랐고 다르게 해석, 평가되는 저의 모습에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던 저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생각했지만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점점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는데 언제까지 계속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고민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자신을 결정해서 목표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타인의 평가와 스스로의 평가를 최대한 받아들이는 쪽으로 생각했습니다.


받아들이는 기준은 어쩔 수 없이 제각각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했던 것’, ‘내가 생각한 나의 모습에서 일리가 있고 다수에게 공감을 얻은 것’, ‘나에 대해 가장 잘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말한 것’, ‘다수가 말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일리가 있고 몰랐던 것’, ‘어떻게 생각해도 맞는 것 같은 나의 생각’ 등 서로 다르면서도 주관적으로 선택한 기준에서 최대한 저에 대한 정보를 확정 지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파편화된 과거에 대한 주관적인 생각과 정보들로 저를 정해본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스스로 정한 저의 모습에서 고쳐야 하는 것, 더 발전시켜야 하는 것,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옳은 것/그른 것, 내가 해야 하는 것 등을 어느 정도 확정 지었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목표를 정했고 계획을 세워서 조금씩 실행해 보았습니다.


찜찜한 부분이 있었지만 점점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위의 과정에서 결정지을 수 있었던 과거의 잘못과 실수를 점차 줄일 수 있었으며 자신의 생각을 예전보다는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타인과의 마찰을 줄일 수 있었고 사람들과 더욱 많이 소통할 수 있게 되면서 점점 나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끊임없이 목표를 정하고 실천해 나아갔으며 어느 방향에서 든 점점 좋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재미와 보람도 느낄 수 있었으며 타인과 함께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성취감과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정했던 자신에 대한 생각은 타인과 같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분명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타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면서 원하는 ‘나’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면서 나름 확신을 가지고 확정 지었던 나의 삶이 정말 내 삶이 맞는지, 내가 원하는 삶이 맞는지, 이런 삶이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장단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굉장히 모호해졌는데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고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람과 상황에 따라서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내가 생각한 옳고 그름에 관한 기준 또한 수많은 이해관계와 각각의 관계에 대한 다양하고 상대적인 관점들, 그리고 이에 따른 주관적인 생각들로 복잡하게 얽힌 이 사회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이 외에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과 타인, 당황스러운 사건과 타인들의 반응,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잘 되는 것 같은 상황, 굳이 신경 쓰고 싶지 않고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신경 쓰이는 상황과 타인 등과 같은 요인들로 인해 맞다고 생각한 삶의 기준과 생각들에 대한 의문이 발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문들은 시간이 지나 그럴 수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왜 그런지 알아낸 후 개인적인 견해를 확인, 수정, 보완하면서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표를 세우거나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중 희미해진 나의(내가 믿고 따르던) 생각과 기준에 따라 자신의 삶을 현실과 타협하게 되면서 발생되는 의문은 저에게 보다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생각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 수많은 이해관계와 주관으로 얽히고설킨 현실, 점점 안 좋아지고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은 현실, 수많은 책임과 해야 할 것들이 존재하는 현실, 한 치 앞도 확신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자신만의 생각과 기준이 희미해진(처음부터 있다고 볼 수도 없었지만) 저는 기존의 생각과 목표를 계속해서 현실과 타협하게 되었는데, 점점 자신을 잃어가는 느낌과 함께 이 타협마저 옳은 타협인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 자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확신을 가졌다고 생각했고, 내가 정한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의지로 계획을 수립,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복잡한 이해관계,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생각들, 그리고 확실하게 알 수 없는 타인의 생각과 상황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은 삶을 살면서 나의 생각을 조금씩 흐릿하게 만들었습니다. 분명 나의 생각은 이러한 데 계속해서 상황과 타인의 분위기와 말에 설득되고, 받아들여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확신한 나의 신념과 철학, 그리고 이에 따른 책임과 목표가 다양한 관점(사람, 상황)에 따라 정답일 수도, 오답일 수도 있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불투명해졌습니다. 예전이라면 마음가짐과 불편함으로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 생각들을 점점하게 되었고 뚜렷했던 삶에 대한 나의 생각과 기준은 흐릿해져 갔습니다. 이렇게 나의 삶과 목표는 또다시,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이 되었고 현실과의 타협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특히,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 과거 내가 생각하고 결정했던 순간들이 과연 맞는 것인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었으며 또다시 의문과 고민의 굴레에 빠져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위로가 섞인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의 답변이었습니다. ‘인생이 원래 그렇다’, ‘꿈과 현실은 다른 것이다’, ‘네가 옳다고 볼 수 있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이는 어쩔 수가 없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네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이해되지만 조금 과한 것이다’, ‘그저 받아들이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으며 보이지 않는 것도 많다’ 등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분명 위의 말과 함께 다가오는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위로와 관심은 힘이 되었고 어느 정도 스스로를 믿고 나아갈 수 있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기에 의문은 계속 발생되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삶과 세상을 정의하는 것인지, 모두가 파편적인 경험에 주관을 넣어 정의한 삶과 이 세상이 과연 사실로서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모든 정의는 각자가 느낀 삶에 대한 주관적인(본능에 따라 자신에게 편하게 끔 해석하는) 정의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모든 답변이 크게 와닿지 않았으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반복하는 답변 속에서 불필요하게(무의미하게) 느껴졌습니다.


근본적인 의구심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살면서 어려움을 느끼거나, 일상에 지치거나, 시간에 쫓기게 될 때면 이런 의문은 내가 생각하고 결정하는 모든 일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이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과 결정을 해서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이게 정말 나에게 맞는 생각과 결정인가?’, ‘이런 생각과 결정을 해서 내가 이루고 싶은 게 있나?’,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이런 생각과 결정을 하고 있지?’, ‘이런 생각과 결정을 한다고 의미가 있을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결정이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와 같은 의문이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통해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에 대해 회의감과 피로감을 느끼면서 의욕과 자존감도 잃어갔습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타인과 함께 소통하면서 어느 정도 나아지는 모습을 통해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엇인지 점점 수많은 사람들(주관)과 상황(다양한 관점) 속에서 다시 희미해졌으며 결국 ‘나’에 대해 다시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어느 정도 흔들리지 않은 생각들도 존재했습니다. 분명 과거보다 더 나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대부분의 상황에서 적용 가능하면서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저의 생각과 결정 또한, 주관을 기반으로 했다는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진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 단순히 더 많은 사람들과 완만하게 지내게 된 것이 더 나아진 삶의 기준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괜찮은 사람, 좋은 사람, 친절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의 기준인가? 그럼 내가 원하는 나의 삶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대체 무엇인가? 나의 삶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여기서 만약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선택한 일을 한다 해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 목표와 의미를 찾고 이를 위해 노력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삶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제가 존경하는 삶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기준과 생각 없이 타인의 인정, 자신의 기호와 같은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기준과 정보들도 ‘나’를 결정한 저는 수많은 사람과 상황의 주관/관점으로 물결치는 사회 속에서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던 내 모습 위에 쌓았던 나의 모습인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했던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이 모호해진 것입니다. 절대 흔들리지 않고 변형되지 않는 튼튼한 토대와 뼈대 없이 상황과 사람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것들로 ‘나’라는 건물을 세우고 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확신할 수 있는 목표와 의미를 찾기 위해 하던 것을 멈추고 자신을 다시 돌아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갈피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바쁜 일정과 함께 마주하고 있는 문제와 어려움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할 여유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혼란스럽고 답답한 시간들이 채워졌습니다.


결국 이런 고민에서 발생되는 스트레스를 참지 못한 저는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현실의 어떤 상황이나 타인에 대해 나의 생각과 기준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며 단순히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쉴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과거 자신만의 신념과 철학을 세우고자 한 본인의 모습조차 점점 잊게 된 저는 상황에 따른 타인의 인정과 비교를 통해서만이 타인과 다른 ‘나’를 잠깐이나마 부분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타인의 인정은 대부분 직업, 재산, 출생, 출신 등과 같은 타인과 상황에 의한 표면적이고 상대적인 기준이었으며 이에 관한 수많은 주관적 편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자연스럽게 같은 편견과 기준으로 타인과 자신을 평가하고 나누게 되었으며 이 기준에 맞춰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끊임없이 예측 불가능하게 변화되는 현실에서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기준과 목표를 생각하고 결정하고 책임질 필요 없이 그저 주어진 기준에 맞추기만 하면 되는 삶이 답답할 수는 있어도 좀 더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이 기준들은 타인과 삶의 가치를 공유하는 사회에서 ‘나’를 모르는 저에게 거의 유일하게 확실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삶에 빠르게 익숙해졌고 스스로가 무엇을 추구하고 싶은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더욱 알 수 없게 되는 것은 물론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추구하고 싶은 것을 목표로 잡고, 이를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이루는 삶 자체를 이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것이 삶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또다시 상황에 따라서, 다수의 분위기와 말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합리화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생각과 결정들이 상황과 타인의 기준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받고 휘둘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타인과 상황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나의 생각과 불편함을 애써 무시하면서 무기력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삶을 사는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시작으로 추가적인 스트레스에 대해서 상황과 타인을 탓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타인과 상황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생각조차 수많은 이해관계와 주관에 휘둘리면서 스스로 확신할 수 없었던 저는 유일한 기준이 된 타인의 인정을 받고자 했습니다. 유일한 삶의 기준이 된 타인의 인정을 저는 더욱 갈구하게 되었고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기 자신을 계속 힘든 상황까지 몰아붙였습니다. 타인은 근본적으로 항상 나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므로 기대와는 다른 상황과 타인의 반응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면서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에 대해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다른 타인에게 자신의 불편한 생각들과 감정들을 표출했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이런 현실에서 불쌍한 자신을 인정을 받기 위한 설득이 되었습니다. ‘나’의 생각과 목표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저에게 느껴지는 모든 불편함과 스트레스는 당연히 나의 잘못과 책임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나에게 정답이자 당연히 인정받아야 하는 것으로서 불쌍한 피해자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과 동정을 호소하는 것 말고는 다른 여지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현실에 따라 나의 목표와 신념, 철학은 이상적인 것이 되며 타인과 상황의 기준 맞춰서 사는 것이 유일한 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저의 생각에 공감해 주지 못하고 위로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적대감이 형성되는 반면 공감과 위로를 해주는 사람들에게는 호감과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들과 주로 어울리게 되었고 저의 생각은 더욱 극단적으로 기울어졌습니다.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공감하는 사람들 간의 대화에서 다른 관점과 견해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으며 모두가 서로를 인정하고 공감하는 생각 안에서 끊임없이 더 많은 이유와 상황들을 찾거나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서로 처지를 이해하면서 위로와 힘을 주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들의 처지를 끊임없이 합리화하게 만들었고 우리는 피해자라고 생각하게 끔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이 사람들과 같이 모이자 군중심리가 형성되었고 더욱 강하게 자신들을 생각을 표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현실은 역시나 이들의 주장에 따라 순순히 변화되지 않았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생각하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타인과 상황을 더욱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자신들의 처지를 더 불쌍하게 만들어서 효과적으로 합리화하고 설득시킬지에 대해 끊임없이 궁리하는 것으로 그들의 생각은 극단적인 편견이 되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방향으로 타인과 상황을 탓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항상 타인과 상황에 휘둘리면서 불안하고, 우유부단하고, 자존감이 낮았던 저에게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었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인정과 공감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딱히 관련이 없음에도 그 사람들이 불편하면 불편한 감정이 들었으며 그 사람들의 생각이 맞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렇게 저의 생각은 점점 집단이기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었으며 자신의 집단 외의 사람들에게 적대심을 갖고 이를 표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타인과 주관적인(자기들만 편한 대로 정해버린) 기준에 따른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러한 갈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저의 생각은 더욱 극단적으로 나아갔으며 사람에 대한 혐오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신의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불만과 스트레스, 혐오심을 유발했습니다. 스스로가 타인의 인정을 추구하면서도 타인을 계속해서 헐뜯는 것으로서 갈등과 스트레스, 혐오의 굴레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정리하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나’를 모르는 상황)에서 저는 어떤 객관적인 기준 없이 그저 타인과 상황에 인정받기 위한 목적을 가진 채 상황과 타인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주관적인 기준만이 존재하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집단적(개인적) 주관(이기심)만을 추구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상황과 타인에 대한 불편함과 무력함 만이 끊임없이 커지는, 의미 없는 합리화를 계속해서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저는 타인과 상황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됨과 동시에 타인과 상황에 대해 커져가는 불편함과 무기력함을 끊임없이 느끼고 합리화하면서 결국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1장에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즉, 과거, 미래로부터 지금을 끊임없이 타협하는 삶은 악순환의 깊은 심연까지 빠져들지 않도록 버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에서 벗어나 지금 자유롭게 살면서 행복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서 생기는 괴리감과 스트레스를 타협을 통해 부정보다는 천천히 받아들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의 결과가 1장에서 언급했던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의 모습과 같다는 점에서 자신을 결론짓지 못한 결정이라는 것은 ‘나’를 모르는 내가 과거, 미래를 부정하거나 받아들이면서(타협하면서) 자신을 결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만이 본인에 대해 제일 잘 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나의 삶’에 대한 정의는 스스로 생각한 자신만의 확실한 기준과 생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나’를 알고 ‘나’를 결정하는 생각과 결정을 할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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