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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Jun Oct 30. 2022

제4장: 삶이란 (4)

순환에 따른 삶의 정의

이런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순환하여 유지/성장할 수 있는 부분을 고민하게 됨으로써 나의 삶은 더 크고 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만약 섣부르게 삶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여 삶을 살게 된다면 삶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불행해질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섣부른 판단과 생각이란 곧 단편적으로 단정 짓는 것을 의미하는데, 모든 존재는 순환으로 존재하는 만큼 내가 인지한 어떤 존재/현상/문제 등에 대해 단순히 나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단정 짓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형태와 움직임을 가진 채 다른 존재와 상호작용을 이룬 상태로 존재하며, 그에 따른 의미와 가치를 사실로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무엇이 확률적 정보들인지 알게 되어 본질적인 존재의 원인이자 본질을 끊임없이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추구 속에서 사람은 보다 옳은 의문을 가질 수 있게 되고, 어떤 생각과 결정을 함에 있어서 실질적인 유지와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실재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으로 다르게 존재하는 확률적 정보가 아닌 분명한 실체적 정보를 기반한 생각과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가 확률로 존재하는 만큼 주관으로 결정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정보(사실)로 받아들이면서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둬야 함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나를 제외한 삶은 타인과 같은 것으로서 정말 과거에 그런 것인지, 지금도 마찬가지 인지,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는 절대적으로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만약 어떤 정보에 대해 주관적 생각으로 단정 지어 버린다면 후에 마주할 수 있는 비슷한 정보(사실)에 대해 자신의 주관적인 기준(편견)을 들이밀게 될 것입니다. 이는 타인을 비롯한 자신(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주관적 기준(편견)을 갖게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어떤 문제를 인지하고, 이를 해결함에 있어서 한계로 작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환에 따라 끊임없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상호작용하면서 변화되는 타인과 나를 계속 주관적인 생각들로 결정짓는다면 3장과 같이 삶의 모순과 악순환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즉, 지금의 내가 분명한 사실로서 증명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이 사실을 토대로 객관적인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 현재, 미래, 타인에 대해 그렇게 알고, 느꼈고,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에 이러한 사실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받아들임으로써 지금의 나를 객관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그러한 사실들로 존재하는 '나의 삶'에 대해 자신을 포함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기준에 따라 정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하여 지금 내가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분명한 사실로서 알 수 있는 정보에 대해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기준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말 인지, 무엇이 실체이고 확률인지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알게 된 정보들이 지금 나의 생각과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나의 삶이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을 통해 올바른 생각과 결정의 기준을 알고, 이 기준을 기반으로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삶을 살면서 과거 어떤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꼈다면 먼저 이 사실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을 고려하여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과연 모두가 납득할 사실로서 이 사실의 존재를 실체로서 증명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알아보는 것입니다. 만약 이과정에서 자신이 확신할 수 없었던 정의가 객관적인 사실로서 증명되고 타인을 납득시킨다면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논리적으로 반박당하거나 반례가 존재한다면 자신이 그동안 느꼈던 감정에 대한 사실은 어디까지나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부분적이고 불완전한(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정보와 주관을 기반한 나의 생각과 감정인만큼 확률로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그런 감정을 느꼈던 그 사람들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할 확률이 높거나 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는, ‘내가 이런 사람들과 어떤 상황에서는 이렇게 행동할 수도 있고 저렇게 행동할 수도 있지만 주로 이렇게 행동한다’와 같은 확률적 정의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과거를 통해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에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하고 강요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가진 과거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기억은 분명 그 삶에게 실재하는 것으로서, 이를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삶의 존재에 대한 부정(모순)이기 때문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사람은 타인을 결정지을 수 없으므로 그 사람의 삶과 하나로 순환해야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진 트라우마(과거)로 현재(사람)를 단정 짓지 않은 채 그 사람의 과거를 확률적 정보(사실)로서 존중하고 받아들여 같이 현재를 더 성장시킬 정보로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순환할 때 비로소 삶을 이루는 모든 존재(과거, 현재, 미래, 타인)는 삶이라는 '하나'로서 의미와 가치를 가진 (스스로를 증명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다양한 시공간(우주/삶)에서 살고 있고, 이 모든 삶들이 지금 이 순간에 중첩되어 공존함으로써 지금 나의 삶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존재는 순환으로 연결되어 필연적이며 부정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 나의 삶은 모든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증명하고 더할 때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어디까지나 확률로서 존재하는 만큼 이러한 생각을 확률로서 인지하고 이러한 확률을 만들어내는 실체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알아내는 것입니다. 확률을 형성하는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의문을 던져야 하는 것으로 확률적으로 존재하는(상황과 타인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질 수 있는 존재) 삶의 문제, 현상, 감정, 생각 등을 알게 된다면 진정한 실체적 문제/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시공간을 이루는 확률은 어디까지나 실체의 움직임과 형태를 통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하여금 보다 올바른 의문을 갖게 되어 실질적인 문제와 원인을 알게 되고, 이를 토대로 성장과 유지를 위한 목표와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보다 많은 사람들의 납득과 함께 응원과 도움을 받게 되어 보다 빠르고 강하게 삶을 성장/유지(순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삶의 특징에 따라 근본적으로 확실하게 정의 내릴 수 없으나 분명 내가 무엇인가를 알고 느꼈던(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실로서 존재하는 삶(지금의 나, 과거, 현재, 미래, 타인)을 객관적인 기준에 따른 확률적인 정보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어떤 주관적인 편견 없이 다양한 측면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근본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삶의 문제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게 된 문제는 자연스럽게 무수히 많은 주관에 의한 것이 아닌 객관적인 삶의 기준에 부합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로 존재하는 지금의 나와 타인은 보다 명확하게 ‘하나’의 의미와 성장의 여지를 알고 강력한 믿음(유지와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아(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주관적인 요소들은 결과적으로 어떤 형태와 움직임이 고정된 실체가 아닌 것이다. 이는 지금의 내가 어떤 생각과 결정, 행동을 하는가에 따라 새롭게 정의될 수 있는 삶 또한, 마찬가지인 것으로 분명 근본적인 형태와 움직임을 가진 실체로서 존재하지만 매 순간 내가 정의하는 삶의 모습은 변화되는 것이다. 즉, 삶을 살고 있는 나와 타인은 ‘하나’의 삶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같은 삶을 이루고 있지 않은 것이다. 각자가 지금 정의하는 삶은 확률적인 것으로 분명 서로가 절대적인 믿음으로 공유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생각하는 사랑과 우정은 오로지 지금 내가 생각함으로써 잠시 동안 확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런 사랑과 우정은 모든 삶에 적용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닌 것이다. 지금 나의 생각과 기분에 따라 우정과 사랑은 그 경계가 없을 수도, 있을 수도 있으며 각각의 특징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시적으로 정해 놓은 각자의 삶이 있을 뿐 확실한 실체는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삶은 끊임없이 상황과 상호작용하여 변화되므로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 우정은 다른 사람은 물론 나 자신에게도 완벽히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일상에서 ‘하나’를 근본적으로 이루는 사랑과 우정을 유지/성장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정보(분명한 사실)를 기반한 서로 간의 투명한 대화(솔직한 자신의 생각과 감정)가 지속적으로 발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코 자신의 삶을 포함한 타인의 삶은 서로 살아가는(삶을 정의하는) 생각과 결정이 근본적으로 같을 수 없으며 서로에게 당연한 것은 언제든지 증명 가능한(서로가 실체적인 증거로서 확인하여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삶은 분명 ‘하나’로서 타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에 서로가 당연하게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때 서로의 사랑과 우정을 감정과 생각을 통해 납득하게 됨으로써 '하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람(삶)은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는 ‘하나’(과거, 현재, 미래, 타인)와 평등한 위치에서 투명한 정보들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소통하고 사랑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을 기반한 순환을 통해 ‘하나’를 이루는 모두가 서로 사랑을 분명한 사실로서 표현하고, 공감할 때 ‘하나’는 강력한 믿음과 함께 삶이라는, 사랑이라는, 우정이라는, 모든 존재가 확률과 실체의 중첩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확률적 정보는 보다 다양한 객관적/주관적 정보를 알고 고려했을 때 본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확률적 정보로 이어지게 됩니다.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고 생각한 사실을 담고 있는 확률적 정보가 보다 많은 관점과 사실들을 고려했다면 개인적으로 내린 어떤 존재에 대한 확률적 정의는 다양한 사실에 부합됨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러한 확률적 정보들이 모여 삶을 구성하고, 삶은 이러한 확률적 정보를 기반으로 타인과 다른 나의 삶을 인지하므로 보다 많은 사람들과 사실들에 부합되는 확률적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삶은 더욱 빠르고 강하게 모든 것의 공통점이자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실체적 문제를 알고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삶은 '하나'로서 끊임없이 변화되므로 삶을 구성하는 실체 또한, 순환에 따라 확률에 의해 그 움직임과 형태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확률이라는 존재는 우주와 자연 속에서 최대한 다양한 존재와 상호작용하여 자신의 확률을 끌어올림으로써 존재합니다. 이는 삶이 객관적인 사실과 확률적인 정보를 끊임없이 순환시켜 각각의 정보가 최대의 효율로 서로를 검증하고 증명할 때(상호보완적인 상호작용을 할 때)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즉, 삶은 유지와 성장에 따라 객관적인 사실로 확률적 정보를 정의하면서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확률적 정보를 다양한 사실로서 확장시키면서 새로운 객관적 사실을 끊임없이 도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나의 삶은 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풍부한 ‘과거의 경험’ /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사실’, 감정, 생각’ /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을 때 더욱 효과/효율적으로 유지/성장 여지를 가질 수 있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필연적인 목표 설정과 달성에 있어서 최대한 많은 정보(타인, 과거, 현재, 미래)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내가 잘못된 생각(섣부른 일반화/단정/주관적 편견/오해)을 하고 있는지를 다른 존재(삶)와 순환하면서 끊임없이 검증하고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형태와 움직임이 순환을 이룸으로써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는 과정 속에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기반으로 한 타인과의 평등하고, 투명한 소통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삶이란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지금의 나(삶)를 결정하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타인과 함께 ‘하나(순환)의 삶’을 구성한 채로 유지와 성장을 향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는 존재인 것입니다.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정보를 평등한 관계에서 주고받음으로써 최대한 많은 실체적 정보를 공유하고, 이를 기반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하면서 같이 더 성장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하나’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기반으로 삶의 형태와 움직임을 표현하면 다음 그림과 같습니다.



*위의 순환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자연과 우주가 정의하는 ‘하나’의 상태와 함께 모두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을 기반해야 하는 것이다. 더 많고 정확한 실체적 정보가 있음으로써 위의 순환은 보다 온전하고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확률적 정보를 실체적 정보로서, 실체적 정보를 확률적 정보로서 검증한다는 것은 본인 스스로가 납득하여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실체적 정보를 기준으로 할 때 보다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확률적 정보를 의미하는 추상적인 개념들과 '하나'로서 삶은 존재하기에 우리는 어떤 생각과 결정을 할 때 주체적인 존재로서 자유롭게 삶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은 '삶'으로서 우주/자연/신체라는 실체적 존재와 '하나'로 존재하는 확률적 존재인 것이다. 이는 사람과 같은 삶이 존재하는 우주(시공간)만이 순환에 따라 존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삶이 그 어떤 한계가 존재하지 않을 때, 그 어떤 외부적인 요인에 결정되어 있지 않을 때 존재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어떤 한계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삶에게 있어 상상뿐이기에 삶은 상상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 상상이 올바른 즉, 스스로의 삶을 증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과 실체적 정보에 대한 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실체적 정보를 알게 되었을 때 일상에서 이 정보들을 고려한 생각과 결정을 하게 되고, 이는 본인은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게 되어 더 크고 강하게 본인의 생각과 결정을 현실(실체)로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체로 하여금 사람들은 더욱 다양한 확률과 함께 성장과 유지를 위한 실체를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본인의 이러한 생각과 결정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되면서 강한 믿음을 기반하는 더욱 강한 존재(삶)가 되는 것이다. 본인의 생각과 결정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것은 순환에 따라 결과적으로 더욱 강하게 성장할 기반이 되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시도해 보지 않았다면 사실로서 존재하는 결과를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며, 삶이 확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인 것이다. 그리고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인 것이다.



이렇게 타인과 내가 납득한 목표를 향해 ‘하나’로 정보를 순환시키면서 최대한 많은 실체적 사실과 확률적 정보들이 서로를 검증하고 생성하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믿음으로 유지하여 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잡고 이루는 과정에서 타인과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평등하게 공유하고, 정보에 대해 자유롭게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이 의견이 민주적 절차로서 존중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에서만이 순환에 따라 자신의 삶이 유지/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유지/성장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목표가 좋다고 한들 ‘하나’가 순환하지 않는다면 타인과의 불신과 오해로 인해 일상과 삶의 근본적인 동력을 잃게 되어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문제에 흔들리게 되고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 분열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생각과 결정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삶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인과 지속적이고 평등한 정보 공유와 이를 기반하는 소통이 필수적인 것임을 의미합니다. 즉, 지금의 ‘나’(나의 삶)를 알아간다는 것은 타인을 평등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기반으로 서로 투명한(믿을 수 있는) 정보(과거, 현재, 미래(삶)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과 솔직한 생각)를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믿음을 형성하고 서로를 납득시킬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주와 자연의 객관적인 사실들이 증명하는, 확률적 존재(시공간)와 실체적 존재(시공간)가 순환을 이루고 있는 삶의 형태와 움직임인 것입니다.



때문에 순환(=삶)을 인지하고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일상에서 순환을 이루어 순환하는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5장 '삶과 사회'에서) 삶은 무엇인가로부터 자신이 정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자유로움에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로 뭉쳐 서로를 도우면서, 의지하면서, 믿으면서 같이 성장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삶에게 있어서 과거, 미래, 현재(상황), 타인이란 근본적으로 지금의 나를 붙잡고 고통을 주는 존재가 아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서로 도움을 주는 존재인 것이며, 이를 증명하는 순환의 삶에서 나의 삶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살고 있는 현재는 후회 없는 과거와 원했던 미래가 되어 스스로 더 성장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용기와 확신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타인과 나의 성장으로 더욱 가치 있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본인에 대한 믿음과 함께 타인과의 사이도 더욱 돈독해지면서 서로의 가치는 ‘하나’로서 증가되는 것입니다. 순환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은 서로를 가질 수 없으며 ‘하나’로서 필연하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내가 어떤 생각과 결정을 하는지에 따라 타인과 함께 현재, 과거, 미래는 서로 삶을 증명할 친구가 될 수도 서로의 삶을 부정할 원수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타인과 내가 정한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과거, 현재, 미래에 따라서 지금 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타인과 ‘하나’되어 생각한 목표와 결정에 따라 나의 삶은 변화되고 결정되는 것입니다. 삶을 결정하는 것은 '과거에 무엇을 했고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내가 무엇을 왜 하고 싶은지'가 되는 것입니다. 타인, 과거, 현재, 미래, 스스로가 나의 삶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하나의 순환을 이루면서 끊임없이 변화(성장과 유지) 하는 것이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과, 우주, 사람 등을 볼 때 질리지 않는 이유는 불확실함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며, 내 삶에 질리지 않기 위해서는 순환하는 삶을 통해 불확실함을 확실함과 함께 중첩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지금 내가 살고자 하는 불확실한 삶이 추구하는 목표가 분명하고 이것이 삶을 성장시키고 가치 있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타인을 납득시킴으로써 존재한다면 그 목표를 향해가는 지금의 나(삶)에게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는 타인과 함께 용기, 확신, 열정, 지혜, 기술 등을 주고받으면서 정한 목표를 같이 이루고 성장하는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친구로서 서로 삶의 가치를 증명하고 존재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나는 ‘나의 삶’이라는 연극의 주연으로서 같이 연극을 성공적으로 이루고자 하는(믿을 수 있는) 조연들과 함께 더 많은 관객 수를 모을 연극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는 타인과 ‘하나’되어 삶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는 생각을 결정하고 이행하면서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 순간, 그리고 이 순간을 존재하게 하는 공간과 시간(과거, 현재, 미래)이 의미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모든 순간은 필연적인 것이 되므로 과거, 현재, 미래는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공간과 함께 의미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과거와 미래를 부정하거나 타협해서 고통받았던 모든 순간들도 결과적으로 지금 나의 이러한 생각으로서 의미와 가치가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경험과 생각, 감정이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질문을 떠올리고 답을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삶이 결과적으로 지금 나의 생각과 결정으로서 증명된 것으로 온전한 ‘나’의 삶을 이룬 것입니다. 지금 내가 순환을 통해 삶을 증명할 때 과거, 현재, 미래는 타인과 현재를 통해 가치 있어지는 것으로서 삶 전체가 나에게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즉,  지금의 자신에게 불행하고 후회스럽게 느껴지는 과거,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현재, 두렵고 자신 없는 미래를 삶으로서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타인(다른 존재)과 함께 순환할 때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사람은 결국 해결될 수 없는 고통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순환하는 삶에서 만이 타인과 함께 과거, 현재, 미래가 점점 더 쉽고 빠르게 서로를 보강하고 다양하게 결합되면서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하나’로 나아가게 되며, 삶은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에 맞닿은 삶으로 나아가는 것으로서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나’를 결정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알게 된 삶을 기반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라본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삶의 가치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류의 삶을 지금까지 존재하게 해 준 삶의 가치를 분명한 사실로서 존재하는 역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와 움직임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면, 이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어 ‘나’를 알고 ‘나’를 증명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북극성과 같은 지표가 되어줄 것입니다. 이러한 지표를 통해 생각한 목표는 자연스럽게 보다 많은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며 보다 확실한 믿음으로 빠르게 삶은 유지,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타인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여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등에 대해 변하지 않는 사실로서 알게 되면, 이는 지금 당장 내가 삶을 증명하는 삶을 사는 근본적인 지표가 되어 앞으로의 삶을 지탱해 주는 단단한 뿌리이자 뼈대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우주에서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삶에게 있어서 이 우주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모든 존재의 근간을 이루는) 순환을 통해 알 수 있다면 삶의 진정한 가치를 우주와 자연을 통해서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순환의 규칙을 보다 넓은 인지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면 그 형태와 움직임은 우주의 형태와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게 된 우주와 삶의 가치는 일상에서 알게 된 자연과 삶의 가치와 그 형태와 움직임이 부합될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나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에 대한 올바른 방향을 이해하게 되어 보다 강력한 믿음으로 삶을 순환시키는 ‘나’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보다 근본적으로 일상에서 존재하는 삶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알게 되어 앞으로 삶의 순환을 ‘하나’로서 유지하고 성장할 수 있는 강력한 원동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납득할 사실을 기반하는 삶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일상 속에서 내 삶의 성장은 어떤 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삶을 증명하는 삶의 가치와 부정하는 삶의 가치는 각각 어떤 것일까요? 이 삶의 가치를 이루려면 지금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또한, 이 우주에서 삶은 어떤 가치로서 존재하는 걸까요? 무생물로 가득한 이 우주는 왜 주체적으로 삶(순환)을 인지하고 결정할 수 있는 생물 즉, 사람은 왜 존재할까요? 왜 삶은 다른 존재와는 다르게 스스로를 인지하고, 의문을 갖고, 상상을 하는 걸까요? 지금까지 정의한 삶과 순환이 이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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