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아마도 (2024)
꽃이 핀다. 부쩍 따듯해진 날씨를 따라 꽃이 핀다. 서늘한 바람이 저들끼리 손을 잡고 바다를 건너 날아간다. 남은 자리에 꽃을 따라온 따듯함이, 어쩌면 따듯함을 따라온 꽃이 핀다.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꽃을 타는 상상을 한다. 아직 찬 기운이 남은 내 손에 당신의 꽃이 만져진다. 부드럽고 가냘픈 꽃잎이 만져진다. 비가 오면 떨어져 녹아내리고, 바람이 불면 흩어져 날아갈 것이다. 나는 당신의 손에서 만져지는 부드러운 꽃잎이 좋아서 잠시도 손을 놓지 않는다. 비가 오면 떨어져 녹아내리고, 바람이 불면 흩어져 날아갈 테니. 녹지 말아라. 흩어지지 말아라. 내 손으로 꼭 잡아서 우리의 손안에 간직하려고.
이 작은 꽃잎이 얼마나 예쁜지요. 그것은 가냘프면서도 따듯한 봄햇살을 닮았잖아요. 그것은 아주 작으면서 당신의 가슴을 닮아 무척 부드럽잖아요. 이 한 장의 꽃잎이 당신의 손과 나의 손을 이어주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것 참 얼마나 기특한가요. 우리의 손 안에서 뱅글뱅글 꽃잎이 돌아요. 손틈으로 살짝 들어온 봄바람에 조금 살랑였다가, 햇살에 반짝이면서요. 이 작은 꽃이 얼마나 예쁜가요.
꽃이 피어난다. 따듯한 손 안에서 꽃이 피어난다. 봄을 닮아 따듯한 당신의 손과, 그런 당신의 손을 따라 뜨듯해진 내 손 사이에서 꽃이 피어난다. 뱅글 돌다, 살랑거렸다가, 반짝이던 꽃잎이 모여 꽃이 된다. 팔랑이는 꽃잎에 신이 나서 당신의 손을 잡고 폴짝 뛰어본다.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꽃잎 하나하나를 세어보다가 마지막 꽃잎을 만질 때, 그 끝자락을 쓸어봤다. 꽃잎은 제각각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가 되어 꽃이 된다. 당신과 나의 손가락이 하나씩 교차되어 포개지고, 하나가 된다. 제각각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하나처럼. 하나의 손 안에서 하나의 꽃이 피어난다.
이 꽃이 떨어질까 봐 무서워. 꽃을 잃을까 봐 자꾸 손을 꽉 쥐게 돼. 당신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일그러져. 당신의 모양을 잃고, 나의 모양을 잃어. 우리는 제각각 다른 손가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내가 당신의 손을 잡으면, 당신이 내 손을 잡으면 손이 아파오는데도, 일그러진 손을 놓지 못하고 있어. 꽃이 떨어질까 봐 말이지. 예쁜 꽃잎 한 장이 꽃이 돼버렸어. 잃으면 다시 주웠을 꽃잎 한 장이 꽃이 되어 버린 거야. 우리가 피운 꽃 말이야. 그런 걸 잃어선 안 되는 거잖아?
꽃이 피어오른다. 뜨거운 손 사이에서 꽃이 피어오른다. 나의 손금을 타고, 뜨거운 마음이 꽃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꽃에 닿는다. 꽃잎의 잎맥을 타고 그 속을 휘적거린다. 꽃줄기는 녹아내리고, 꽃잎은 타오른다. 까만 연기를 뿜으면서, 하늘 위로 피어오른다. 손안에 녹은 꽃줄기가 거슬거슬하게 남는다. 매캐한 연기가 코로, 입으로, 눈으로 파고든다. 뜨거운 꽃줄기에 닿은 손바닥에 빨간 줄이 남았다. 당신의 손에도. 내 손에도.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꽃잎을 나는 모른 체하고 싶어요. 이럴 리가 없잖아. 우리는 그저 사랑했을 뿐인데, 우리의 꽃이 이렇게 사라질 리 없잖아. 나는 당신을 그저 사랑했을 뿐인데, 그게 꽃을 죽였을 리 없잖아. 내 사랑이 이런 컴컴한 연기를 내뿜을 리 없잖아. 부드럽고 가냘픈 꽃잎이 꽃이 되어서 기뻤잖아, 당신도? 뜨겁지 않아, 난 뜨겁지 않아. 내 손에 남은 빨간 한 줄이 상처로 남아도, 나는 이 꽃을 놓을 수 없어. 이 꽃은 당신과 나의 꽃이잖아.
꽃이 날아간다. 꽃이었으면서 꽃이 아닌 것이 되어 날아간다. 끔찍한 연기가 휘휘 날아다닌다. 지독한 잿더미가 손 안에서 바스러진다. 꽃이었으면서 꽃이 아닌 것이.
당신은 손안에 꽃의 어느 한쪽도 챙기지 않고, 내 손에 꽃의 모든 것을 남겨 놓고선 끔찍한 연기 사이를 뚫고 떠나가요. 당신이 떠나는 길을 이렇게 만들어서 미안해. 나는 바닥을 기면서 주섬주섬 꽃이었던 것을 주워요. 손바닥 가득 빨간 상처가 생겨 그것이 닿을 때마다 가슴이 꺼칠꺼칠해져요. 이미 타버린 꽃을 주워요. 꽃이었으면서 꽃이 아닌 것을.
아마도. 당신과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