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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선 Jul 30. 2019

또 하나의 나

논어 자한편 '무고'

2019년 7월. 최근 들어 달달한 걸 별로 안 좋아하기 시작했다. TV 프로그램에 보면 당이 떨어졌다고 하면서 달달한 걸 먹어야겠다는 멘트가 곧잘 나온다. 하지만 너무 달달한 걸 먹으면 당이 급격히 치솟게 되고 또다시 급격히 떨어지는 오르락내리락 현상이 생긴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요즘은 후자에 더 신뢰가 간다. 요즘 들어 혈당 수치의 오르내림에 따라 감정의 요동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타벅스에 갈 때는 아메리카노 아니면 생수를 마신다. 요새는 수입이 안 좋아 절약 생활을 하는 중이라, 커피는 집에서 마시고 생수를 즐겨 사 먹는 중이다. 그렇게 생수를 자주 사 마시다 보니, 재활용할 겸 그 생수통을 물병처럼 쓰곤 한다. 그런데 또 그러다 보니, 다른 곳에서 물을 담아와서는 그 물을 또 스타벅스에서 마시고 주문을 안 하게 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런 나의 얘기를 듣고 친구는 말한다. “스벅 기생충이냐”     


그러든 말든 난 합법적이기에 아랑곳하지 않던 어느 날, 생수 리필하는 짓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날도 스벅에 들어가 공부 테이블의 한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었다. 스타벅스는 오픈마인드 정책상 음료를 안 시켜도 되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왠지 구색을 갖출 겸 리필된 생수통을 꺼내놓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며 눈치 보고 있는 내가 보였다. 그때 나는 ‘꺼낼까 말까 꺼낼까 말까...’라며 갈등하고 있었다.     


잘하다가 왜 지금은 신경이 쓰이는 걸까. 가만 생각해보니, 공교롭게도 그날은 배달의 민족에서 배달료를 더 얹어주는 피크타임 할증 프로모션이 있었던 터였다. 4시간을 일하고 단숨에 10만 원이라는 거액을 벌고 나서, 스벅에 들렸던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 사실 내가 생수 하나 사 마실 형편이 안 되는 가난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도 가난과 비가난의 살림을 왔다 갔다 하다 보니, 헷갈렸던 것이다.

지금 나는 돈을 꽤 벌고 있는 입장인데 합법적인 무료 이용을 하려고 하니, 그 상황에 스스로 나 자신이 구차해짐을 느꼈던 것이다. 실제 내 형편에 맞지 않는 고집스러운 행동은 나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절약이라는 키워드를 고수하다가 나도 모르게 수전노가 되어버릴 뻔한 것이다. 가끔 그렇게 한 가지를 고집부리다가 극한으로까지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논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子絶四(자절사) 毋意(무의), 毋必(무필), 毋固(무고), 毋我(무아).

공자께서는 네 가지가 없으셨다. 사사로운 뜻, 꼭 해야 하는 것, 고집 부리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없으셨다.

 


공자께서는 이런 네 가지의 폐단을 하지 않으신 게 아니라, 아예 없는 경지에 이르셨다고 과거 학자들은 해석했다. 그래서 절(絶)이라는 한자를 ‘없으셨다’로 해석한 것이다. 과거 학자들은 공자님이 태어날 때부터 성인이셨다고 가정하기를 좋아했다. 이 사실을 공자님이 아신다면 과연 좋아하실까.

나는 절(絶)이라는 글자를 기본 뜻으로 살리고 싶다. 그것이 공자를 우리 옆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게 하는 일일 것이다. 없는 경지에 이르려면, 끊어 없애는 중간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끊을 절(絶)이라는 한자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끊어 없애셨다’로 해석하고 싶다.     


또, 이 네 가지는 단계적으로 순서가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떤 한 사사로운 뜻을 품고(意), 반드시 그러려고 굳게 품어 행하고(必), 거기에 매달려 고집부리다가(固), 결국 새로운 ‘또 하나의 나(我)’라는 것이 내 안에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또 하나의 나’를 여기저기 내세우게 되면 현 공간의 룰과 새로워진 나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한 ‘나’를 다른 곳에서도 정해진 모범답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네 가지를 끊어 없애셨던 공자님과는 달리 나는 아직 네 가지를 고루 갖춘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다. 늘 현 상황을 다시 돌아봐야 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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