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나에 대해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참 불편하다. 뭘 근거로 그렇게 결론 내리는 것일까 의아하다. 어쩌면 타인이 객관적인 외부의 시각으로 관찰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지만, 드러난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당신은 지금 이런 마음인 거야.”
라는 말을 상대한테서 들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내가? 정말?’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는데, 상대방이 어떻게 내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있을까? 그 사람이 그런 판단을 할 만큼 내가 충분히, 정확하게 내 마음을 표현했는지조차 모르겠는데 확신에 찬 어조는 오히려 내 마음의 문을 닫는다.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을 더 잇자니 변명이나 설득을 하는 것 같아 피곤하다. 그냥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죠. 아닐 수도 있고요.”
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며 그 상황을 끝내고 싶다.
나는 혈액형, 별자리, MBTI 유형, 애니어그램 유형 등으로 나를 규정하는 것도 싫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라는 결과를 보면, 일부 일치하는 것도 있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점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지어 내 성씨나 고향을 가지고 나를 규정짓는 말을 들으면 뜨악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의 다른 존재와 인간을 구분 짓는 것은 ‘변화하는 능력’이라고 믿었다고 한다(쥴리언 바지니, 안타니오 마카로, <당신의 질문은 당신의 인생이 된다> 67쪽).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같은 사람이라 볼 수 있을까? 학창 시절 나는 늘 많은 친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을 만큼 매우 외향적이었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발표하는 것에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발표할 일이 생기면 온몸이 떨린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
라는 문장에 o, x로 답하기 어렵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상황이 어떠한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종류의 질문을 통해 나를 어떤 집단의 특성에 끼워 맞추는 것에 거부감이 든다. 나를 고정된 존재로 보는 것이 불편하다.
하지만, 때로는 내가 보지 못하는 내 모습에 대해 말해주는 주위 사람들에게 고맙다. 그들 덕분에 내가 놓치거나 모르고 있었던 나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의 애정 어린 시선과 관심은 위로와 용기가 되곤 한다. 이럴 때는 심지어 그들이 나에 대해 잘 모르거나 잘못 말해도 큰 상관이 없다. 그러니 결국, 중요한 것은 의도와 마음이다. 정말 나를 위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마음은 미세한 표현으로도 전달이 된다. 어쩌면 내가 불편했던 것은, 상대방이 나에 대해 말을 할 때 그 말 안에 담겨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마음은 아닌, 그저 섣불리 나에 대해 판단을 내려 버리는 마음.
나무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니다. 가지를 어디로 뻗을지 모르고, 얼마나 무성한 잎을 달지 알 수 없다. 가만히 있는 것 같은 나무도 매일 성장하고 변화한다. 하물며 이리저리 움직이며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다양한 정보를 접하며 스스로 ‘생각’하는 내가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다. 나를 어떤 유형의 사람이라는 고정된 틀에 가두는 대신, 이런저런 매력이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갔으면 좋겠다. 나에 대해 단정 짓는 사람들 말에 동의하며 멈추지 말고, 새로운 시각으로 오늘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