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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Oct 04. 2020

카트라이더 수업

운전 중에 역주행을 일삼고, (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벽을 핥는다. 실제 운전 경력은 1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온라인 상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다.


아이는 게임이라고 하면 눈빛이 달라진다. 한동안 브롤 스타즈에 빠져 있더니 요즘은 카트라이더에 흥미를 보인다. 고맙게도(?) 아이는 자신의 즐거움을 부모와도 나누려 한다. 한때 내게 브롤 스타즈를 가르쳐 준다더니 내가 도무지 말귀를 못 알아먹고 개손으로 버벅거리는 것을 보다 못한 나머지 스트레스 받는다며 방으로 들어가서 누워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도 이번에 다시 카트라이더를 전수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학습자(나)를 포기하지 않는 교수자(아들)의 의지가 보인다. 배우는 입장에서는 가르쳐 주고자 하는 이의 모습이 한편 고맙기도 하지만 내심 부담스럽고 불안하기도 하다. 언제 또 제 머리를 쥐어뜯고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가 버릴지 누가 알겠는가?


아들에게 카트라이더를 배우면서 학습 동기와 흥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끼고 있다. 아이는 카트라이더(학문의 세계)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역설하며 산책 중에도 아빠는 모르는 자신만의 기술을 몰래 설명해 주기 바쁘다. 커튼 드리프트 테크닉, 역방향 게이지 부스터, 더블 드리프트, 루찌,... 아들이 말하는 내용의 절반 이상을 못 알아듣겠다. 하도 열심히 설명을 해 주고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척은 하지만 눈이 자꾸 다른 데로 향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 수업 중에 아이들도 이런 심정이겠구나 싶다. 집에 와서 저녁에 실전을 통해 가르쳐 준다고 했다. 나는 시간을 몇 번 미루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자는 척을 해 버렸다. 내가 잠든 줄 알고 실망해서 돌아가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나의 학습 동기와 흥미는 아들의 교수 열의에 미치지 못했기에 다만 순간을 회피하고 싶었다. 수학 공부 좀 하자고 하면 급 피곤해하거나 배가 아프다고 했던 아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다음 날은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들어야 했다. 아이는 내가 언젠가 자신과 같은 팀이 되어 게임을 함께 즐길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려면 내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시험에 통과해야 고, ‘자격증’을 따야 다! 아들의 친절하고 끈기 있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역주행을 해댔고, 차를 벽에 쿵쿵 박다 못해 도로를 놔두고 벽을 탔다. 지켜보던 아이가 안타까움에 자신도 모르게 몇 번 손이 나왔지만

“제가 대신해 드릴 수도 있지만 그러면 그건 엄마 실력이 아니잖아요.”

라고 말하며 개입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자격증 시험에 계속 떨어지며 ‘학습된 무기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이는

“연습이 답”

이라며 나를 격려했다.


앨랜 피즈와 바바라 피즈는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원칙>에서 목표를 쥐고, 이미지화하고, 입으로 내뱉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 목표를 이미 성취한 내 모습을 상상하고, 그 모습을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한 심상으로 간직하고 수시로 떠올리는 시각화 기법이 목표 달성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나는 벽 대신 도로의 중앙을 불을 뿜으며 쾌속 질주하는 카트라이더의 모습을 상상해야 할 것이다. 아이는 경이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엄마, 언제 이렇게 실력이 향상됐어요?”

하고 물어보고 나는 다만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일 뿐이다.


문제는 내가 그런 나의 모습을 ‘간절히’ 원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목표는 간절해야 한다. 내가 추구하는 목표가 진정 나를 위한 것인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라면 그 목표를 향한 동력도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다. 지금 내 경우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아들이 원하는 대로 내 카트라이더 실력이 향상되면 좋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사실 나 스스로는 큰 흥미를 못 느끼고 있다. 학생들도(우리 아이를 비롯해서ㅠ) 자신이 공부하는 이유가 부모나 선생님이 하라고 하니 할 뿐 정작 본인은 흥미나 동기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을 것이다. 교실에 앉아서 선생님 수업을 듣고 있을 때나 집 책상에 앉아 있을 때도 그 자체가 고역인 아이들이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한 채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아이들의 심정이 상상이 된다.


핸드폰에 깔아 둔 카트라이더 앱에서 수시로 “지금은 씽씽 달려볼 시간!”이라며 알림이 온다. 학생들의 학습 알람처럼. 아들이 나한테 와서 그동안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묻거나 실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직접 확인해 보자고 하면 뭐라고 핑계를 댈까 벌써부터 고민이다. 당분간 아들에게 그동안 수학 문제지는 얼마나 풀었는지 묻거나 실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같이 풀어보자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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