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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Oct 21. 2020

포기한 게 아니라 선택한 겁니다.

아이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기회가 온다고 해서 다 잡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그건 그때 가서 감당해야 할 일이다. 열정이 솟지 않는데 나중에 필요할 것 같아서, 해 두면 좋을 것 같아서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해 두면 손해 볼 것 없고 후회하지 않는 일들이 많기야 많다. 하지만 어쩌면 그 역시 다른 것을 선택하지 않은 상태에서 보기 때문 아닐까?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포기가 아니라.

‘포기’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포기: 1. 하려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어 버림.

          2. 자기의 권리나 자격, 물건 따위를 내던져 버림.

‘포기’라는 단어가 이렇게까지 부정적이었나?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그만두어 버림’? 그냥 내던지는 것도 아니고 ‘내던져 버림’? 음.. 생각해 보니 박력 있고 멋있어 보이기도 한데? 소심하게 조용히 내려놓는 모습이 아니라 힘차게 그만두어 ‘버리고’, 내던져 ‘버리는’ 모습. 그렇게 보면 ‘포기도 선택’이 아닐까? 때로는 포기하는 것이 포기하지 않는 것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올해는 나의 진로와 관련해서 두 개의 큰 기회가 왔다. 여건도 나쁘지 않은 데다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가능성도 제법 높은 편이었다. 내가 그 길을 간다면 ‘부’까지는 모르겠지만 ‘명예’를 얻고, 권한도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세질 것이다. 그만큼 고민이 많이 됐다. 그때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까 봐’였다. ‘해 보고 후회하는 것이 안 해 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은 내가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마다 나를 ‘하는’ 쪽으로 이끌어 왔다. 그래서인지 ‘하지 않는 것’은 용기나 자신이 없어 회피하는 것이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저 변명에 불과해 보였다. 하지만,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할까 봐’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더 용기 없는 결정 아닐까? 일어날지 말지도 모를 미래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안전한’ 길을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본인이 하고 싶어도 여건이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아이가 있는 엄마들이 육아를 위해 공부나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도 그중 한 예이다.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아쉬움은 나중에 아이가 커서 기대를 저버리는 모습을 보일 때 서운함이나 원망으로 변하고 심한 경우엔 분노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때,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하며 살았는데!”

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때 다 자란 아이는

“누가 그렇게 하랬어요? 엄마도 엄마 인생 살지 그랬어요!!”

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뭐, 이 자식아?” (찰싹!)

“에잇!” (쾅! 문 열고 나가는 소리)

(아.. 아무래도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


그런데 실제로 많은 자녀들이 엄마가 하는 말 중에

“내가 누구 때문에 사는지 알지? 엄마는 너 하나 보고 산다.”

식의 말에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느낀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있다. 부모가 나 때문에 산다니... 부담감이 감사함을 능가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난 나 때문에 산다.”또는 “난 나를 위해 산다.”라고 말한다. 황당해하며 웃는 아들의 모습.


물론 부모가 어떻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기 위주로 살 수야 있겠는가? 자신이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자식을 위해 미루거나 접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포기한다’는  이런 순간조차 내가 더 가치를 두는 쪽으로 ‘선택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가지 않은 길은 언제나 아쉬움과 미련이 남기 마련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아이가 있는 여성도 ‘육아 때문에 포기’ 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 계발을 하면서 경력을 쌓아가는 모습을 멋있다고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 여성들이 속으로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왔는지 깡그리 무시한 채 “운이 좋았다”거나 “애 엄마가 애는 돌보지 않고...”라는 돼먹지 못한 소리를 주워섬기는 사람들도 있다. 소위, ‘잘 나가는’ 여성들에 대한 시기, 질투나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다분하게 “독하다.”는 말을 내던지기도 한다.


육아를 병행하며 직장 생활을 계속하는 것도, 육아를 위해 전업 주부가 되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마찬가지로, 더 높거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도 포기가 아니라 자기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전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 주지만, 행복과 즐거움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잡을지 말지를 결정할 때 성공 가능성 못지않게 고려해야 할 것이 자신이 어느 쪽에 더 가치를 두느냐이다. 남들의 평가는 서랍 속에 넣어두기로 한다.


사실, “너한테 정말 어울려!”, “넌 충분히 잘할 것 같아!”라는 남들의 말은 얼마나 달콤하고 매혹적인가? 그런 말들에 그저 나 자신을 맡기고 싶어진다. 반면, “그냥 이대로 살 거야?”, “나중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라고 물으면 그럴 자신 없다. 이런 말들을 다 물리치고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일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적극적 행위이다. 나를 아끼는 지인들의 격려. "자신의 성장을 느끼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그들의 말에도 동의한다. 아이는 제가 알아서 크는 데다 엄마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며 더 많이 배운다는 말도 맞다.


나는 다만 아이 옆에 더 머물고 싶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물론 커서 독립할 때는 질척거리지 않고 쿨하게 보내주리라. 그때까지 함께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그 자체로 소중하고 가치 있다. 같이 있는 순간조차 머릿속으로는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고, 시간에 쫓기거나 피곤한 얼굴로 아이와  지내지 않기를 바란다. 실은 지금 이미 그러고 있어서 더 심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사회적으로 더 인정받고 자존감과 성취감이 올라갈 수 있는 길로 가는 문턱에서 잠시 문고리를 잡고 만지작거렸지만 결국 그 문은 열지 않기로 한다. 아이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한 선택으로서...



(집에 있는 뱅갈 고무나무. 몸통에서 잎이 하나씩만 나고 키가 쑥쑥 자랐다. 대나무 되는 줄... 결단 끝에 위로 뻗는 몸통 줄기를 잘랐더니  줄기가 옆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고 그 줄기에서 또 다른 잎이 나왔다. 위로만 크는 줄 알았던 나무가 옆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성장을 멈춘 것은 아니다. 성장의 방향과 방법이 다를 뿐.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기만, 위쪽으로만 성장하는 것을 멈췄을 때, 옆으로 뻗어나가며 주위 사람을 더 품고 같이 성장할 수도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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