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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무지 Feb 13. 2024

앞서 가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린 아지

이렇게 끝내긴 아쉬워서

아지는 항상 사람보다 앞서서 가야 하는 병이 있다.

본인이 뒤에서 가면 죽기라도 하는 걸까, 반드시 앞에서 먼저 가야 한다.


문을 열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지는 문 앞에서 서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린다.

도어록이 띠리링- 소리를 내면, 달리기 경주의 총성이 울린 듯 문밖으로 뛰쳐나간다.


하지만 뛰쳐나가기가 무섭게 다시 뒤를 돌아, 본인만 내보내는 게 아닌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몸은 앞을 향하지만, 머리만 돌려 엄마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내가 문밖으로 나와 문을 닫고 다시 도어록에서 띠리링- 소리가 나면,

아지는 그제야 안심하고 다시 쏜살같이 앞을 향해 달려간다.


엘리베이터 앞, 아지는 멈춰 서서 또다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기만을 간절히 기다린다.

자기가 가장 먼저 타야 하기 때문일 테다.

엘리베이터에 당차게 탄 후, 안을 코로 킁킁거리며 수색을 한다.

그리고 그 수색이 끝나면 다시 문 앞에 서서 총알처럼 튀어나갈 태세를 취한다.


모르는 사람이 함께 타 있어도 예외는 없다.

나는 아지가 그럴 때마다 뒤로 오도록 목줄을 당긴다.

문제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과 함께 있을 때, 아지가 천천히 엘리베이터를 벗어나는 어르신을 좀처럼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지는 '빨리빨리'를 외치며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빠르게 누르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힘을 주어 기어코 먼저 나갈 때면, 나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아지에게 한소리 한다.

'야! 어르신 먼저 내려야지! 너는 예의가 없이 왜 그래!'

강아지가 예의가 있는 게 말이 안 되지만, 나는 예의 있는 사람임을 표출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부모님 댁을 기준으로 산책 코스를 말해보도록 하겠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면 첫 번째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천을 따라 걸을 수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또 2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우리 아지는 앞서서 걷는 것뿐만이 아니라, 날마다 본인이 원하는 산책 코스가 있다.

자기가 가고 싶은 코스가 아니면 발에 본드라도 붙여놓은냥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오늘은 어디로 갈래?'

1층에 도착하면 내가 묻는 질문이다.

그러면 아지는 집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오늘의 산책 코스를 정했다는 듯 바로 발걸음을 뗄 때가 있고

나름 고민을 한 뒤에 결정할 때가 있다.

한번 결정을 마치면 다시 뒤돌아 서서 다른 곳으로 절대 향하지 않는 줏대 있는 강아지다.


천을 따라 걷는 왼쪽 선택지는 산책 코스가 짧다.

그래서 아지는 컨디션이 안 좋거나 오래 산책할 기분이 아닐 경우에 자주 고른다.

그냥 내 생각일 뿐 아니냐고?

맞다. 지레짐작으로 얘기하는 거긴 하지만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


오른쪽 선택지 중 한 개는 1시간 코스고 다른 하나는 1시간 30분 코스인데

내가 오래 산책하고 싶은 날, 왼쪽으로 가겠다는 아지를 억지로 데려간 적이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아지는 표정부터 굳어서는 신나는 발걸음이 아닌 무겁고 축 처진 걸음으로 걷는다.

나는 그런 아지를 모르쇠 하며 계속 가던 길을 가려고 하지만, 할 수 없이 뒤돌아 돌아간다.

'그래! 네가 가고 싶은 길로 가자!'

그러면 아지는 그제야 웃는 얼굴로 방방 뛰며 발걸음을 가볍게 옮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게 이럴 때도 쓰이는 말일까.

어이가 없는 건, 본인이 1시간 30분 코스를 선택해 놓고 막상 가니 마음이 변한 경우다.

다른 산책로를 가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이 산책로는 좋으나 이제 더 이상 산책을 중단하고 싶은 것이다.

1시간 30분 중 50분 정도 했는데 40분이 남아서 억지로 끌고 가야 할 때는 진짜 죽을 맛이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고 계속 가기에도 긴 시간, 40분.

'아지야, 집에 가자!' 하면 다시 힘을 내어 가다가도 멈추기 일쑤고 간식으로 유인해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내가 6킬로가 넘는 이 무거운 강아지를 둘러업고 50걸음 정도 걸으면,

고맙다는 듯 다시 기운을 차리고 걷는다.


엄마는 아지가 산책할 때 냄새 맡는 시간이 길어지면 꼭 하는 행동이 있다.

'아지를 잡으러 갑니다!!~'

이때 손모양은 호랑이처럼 잡아먹을 듯하고 아지에게 슬금슬금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면 아지는 깜짝 놀란 건지, 정말 잡히기 싫어서 술래잡기를 하는 건지

장난치듯 엄마에게서 멀리 뛰어 도망간다.


하지만 산책을 중단하고 싶을 때에는 이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갑자기 힘이 확- 풀려버린 걸까?

우리 아지는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또 어느 날은 본인이 짧은 코스를 선택해 놓고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불만족스러운 모습을 띤다.

비숑을 키우는 집은 알 텐데, 비숑타임이라고 에너지 소비가 부족했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온방곳곳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걸 말한다.

우리 집은 아지타임이라고 하는데,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우리가족은 뛰어다니는 아지 때문에 다칠 수 있어서 허수아비가 된 것처럼 가만히 서있는다.

아지타임이 끝나면, 얼음 땡! 을 한 듯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다닌다.

아지는 한차례 뜀박질이 끝났으니 자리를 잡고 엎드려 헥헥- 거리고 말이다.


아지는 산책을 하면서 반드시 꼭 마킹을 하는 곳이 정해져 있다.

어제도 맡고, 오늘도 맡고, 내일도 맡을 그 냄새를 꼭 맡아야 하는 건지.

통과의례처럼 반드시 거쳐야 하는 그 마킹 장소.

사람으로서는 그 모습이 참 신기하다.


더 놀라운 건, 갈 때 맡았던 냄새를 올 때는 맡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지는 본인의 채취를 남겼다는 걸 멀찍이 있어도 기억하는 걸까?

아니면 멀리서 냄새를 맡고 '아직 잘 남아있군'하며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일까?


이 질문에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또 있다.

처음에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물줄기였지만, 나중에는 나왔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때가 수두룩하다.

한두 방울이나 흘렸을까?

그런데 채취를 남긴 걸 기억하는 게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인 거다.

아무튼 아지의 채취 기억법과는 별개로, 한두 방울만 흘린 모습을 본 우리 가족은 아지를 보고 놀린다.

'나오지도 않는구먼, 다리 잘 찢어진다고 자랑하려고 드는 거야?'하고 말이다.


아지는 산책 코스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는데,

그건 바로 산책 참여 인원이다.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엄마와 단 둘이 산책할 때보다

한 명, 두 명, 세 명, 네 명이 추가될 때 아지의 행복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아지가 사람이었다면 외향형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런 이유로 나는 가족이 다 함께 산책하는 걸 선호하는데,

가족들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니 잘 참여하지는 않는다.

보통은 나랑 엄마 그리고 아지, 셋이서 산책하니까.


아지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면서 계속 질문을 던지는 나를 보니 조금 슬프다.

아지에게 직접 대답을 들을 수 없고 평생 예측만 해야 하니까.

그래도 평생 아지를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질 테다.

네게 늘어나는 질문만큼 네게 관심이 많은 것일 테니까 말이다.

대답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엄마가 계속 알아가 볼게!

오늘도 사랑한다. 우리 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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