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무지 Feb 14. 2024

뜨겁고 차가운 걸 구분하는 천재견

이렇게 끝내긴 아쉬워서

우리 엄마는 매일 아침 뜨거운 커피로 하루를 시작한다.

커피를 타서 먹어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갓 탄 커피 향이 얼마나 향기로운지 말이다.


우리 아지는 먹는 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간다.

아지의 청각은 작은 커피 믹스 봉투를 뜯는 짧은소리도 미세하게 캐치한다.

그래서 졸린 눈을 번쩍 뜨고 침대 아래로 점프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커피 믹스가 담긴 컵에서 그토록 향기로운 냄새가 나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지의 동공은 이미 마약 한 것처럼 커져서는 코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먹을 거에 눈 돌아간 아지가 뜨거운 커피도 먹겠다고 달려들든 것이다.

엄마는 난리법석인 아지를 어떻게 제지해야 하나 인생일대의 고민에 빠졌다.

왜냐면 엄마는 식사할 때 달려드는 건 용납해도,

커피를 먹을 때만큼은 모두를 숙청시켜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한글을 모를 때부터 '우아'라는 단어를 내게 가르쳤다.

어릴 때 아이들은 본인을 통제하지 못하고 감정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소리를 지르거나 시끄럽게 떠들거나 옹알거릴 때면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엄마 우아하게 커피 좀 마시면 안 될까?' 


분명히 아지한테도 저렇게 말했을 테다.

딸들은 사람이라 말귀라도 알아듣지, 아지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어느 날 커피를 다 먹은 후에,

뜨거운 빈컵을 '아 뜨거워!'라는 말과 함께 아지 발에 살짝 올려놓았다.

아지는 깜짝 놀랐고 그 후론 어떤 음식이든 '아! 뜨!!~'하면 달려들지 않았다.

그 후론 엄마는 우아하게 소파에서 커피를 드실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음식에 '아! 뜨!!~'라고 하니 아지는 속은 느낌이 들었는지, 의심쩍었는지

이제는 '아! 뜨!!~'라는 말을 해도 무시하고 음식을 향해 몸을 던진다.

커피만큼은 빼고 말이다. 다행히 커피 향은 뜨거웠던 걸 기억하나 보다.

나도 1일 1 커피를 하는데, 엄마 덕분에 우아한 커피타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지는 차가운 물이 아니면 잘 마시지 않는다.

또한 물에 사료나 간식 같은 게 떨어져 있으면 마시지 않는다.

한 달에 한번 샤워하는 아지 네가 제일 더러우면서 깔끔한 척하는 게 너무 웃기지만 나는 너를 존중한다.


부모님 댁에서는 그러지 않지만, 자취방에서는 아지의 물그릇을 자주 갈아준다.

찬 물이 없을 때는 얼음을 동동 띄워주지만, 아지는 겁쟁이라 움직이는 얼음이 무서워서 먹지도 못한다.

사료나 간식이 물에 가라앉아 있으면 빼주지만, 들어갔던 걸 알아서인지 갈아줄 때까지 마시지 않는다.

나도 까다로운 편인데, 엄마인 나를 닮아 그런가 아지도 참 까다롭다.


사람은 똑같은 쌀밥을 먹지만 다양한 밑반찬과 공존한다.

하지만 아지는 매일 같은 사료로 식사를 한다.

얼마나 질릴까?


아지의 사료를 바꿔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아지는 눈물 알레르기가 있어서 피부와 관련된 사료를 먹지 않으면 눈 주위가 갈색으로 물든다.

눈물이 계속 나오고 손으로 계속 눈을 비비고 안 좋은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먹이는 사료를 먹은 후로는 눈물이 나와도 눈곱만 만들어낼 뿐 알레르기 반응은 없다.


우리 가족은 매일 같은 식사를 해야 하는 아지를 가여워했고

사람 밥이 얼마나 맛있는 지도 알기 때문에 더 미안해했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는 나 몰래 식탁 밑으로 음식을 던져주곤 했는데,

나는 '애한테 그런 거 주면 안 돼! 얘 고급 입맛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사료 안 먹을 수도 있어!'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속으로는 '그래 내가 준 거 아니니까 괜찮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먹겠어.'라며 합리화를 했다.


내 잔소리는 역시나였다.

아지는 부모님 댁만 가면 식음을 전폐했다.

식사시간이 되어도 밥을 먹지 않았고, 우리가 먹는 모든 것에 참견하며 얻어먹으려 했다.

아지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으로 엄마를 응시하며 엄마의 다리를 툭툭 친다.

그러면 엄마는 손자가 할머니 댁에 놀러 가 응석 부리듯 취급하며

'아이고 우리 아들이 이걸 먹어야겠어~'하고 음식을 입에 쏙- 넣어준다.

나는 '엄마한테만 오면 아지와의 규율이 다 깨져버려!'라며 싫증을 내지만 별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사람은 대체로 뜨거운 음식을 먹기 때문에, 아지한테 음식을 줄 때는 뜨거운 상태이다.

그래서 음식을 호호 불어가며 손이나 젓가락으로 쫙쫙 먹기 좋게 찢는데,

아지는 우리가 호호 부는 행동이나 찢는 행위를 보면 자기 거라는 것을 아는 거 같다.

우리가 그런 행동을 취할 때마다 자세를 고쳐 앉거나 입맛을 다시는 등의 행동을 하니까 말이다.


웃긴 건, 우리가 먹는 음식을 탐내고 맛있는 음식이라는 걸 다 아는 듯 냄새를 실컷 맡아놓고서도

음식을 건네줄 때 반드시 냄새를 맡고 입에 넣는다는 것이다.

주는 대로 다 먹을 것처럼 굴다가도 꼭 냄새를 맡는 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강아지'가 아닌가 싶다.


우리 가족은 아지를 정말 좋아하지만 배신감도 많이 느낀다.

먹을 것을 줄 때는 충성을 맹세하지만, 먹고 나면 바로 휙- 돌아 나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평소에 내 곁에 착- 붙어 있었으면서도 부모님 댁에 가서까지 내게만 있으니 마음에 안 들 수밖에.


그래도 잘 때만큼은 우리 가족이 안전하게 잘 자고 있나 한 명 한 명 순찰을 돌고

가족이 일을 마치고 한 명씩 집으로 돌아오면 현관문으로 반기러 가니 아지를 미워할 수는 없을 테다.

특히 내가 오라고 해도 엄마아빠 옆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면, 부모님은 감동을 무한하게 받는 듯하다.

부모님과 우리 아지 모두 다 너무 귀엽다.


요즘에는 아지가 사료를 질려하는 듯한 표현을 많이 해서 다른 사료와 조금씩 섞어주고 있다.

아지는 건식보다 습식사료를 더 좋아한다.

나는 엄마로서 자격이 있는 건지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4년 동안 딱딱한 건식 사료만 먹인 게 미안하다.


그리고 강아지들이 사료를 질려할 때는 사람처럼 요리하는 척을 해서 주면 잘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도마를 꺼내어 칼질하는 척을 해보기도 하고

전자레인지에 10초만 돌려 쿠키향이 나게 해서 주기도 하고

많은 행동들을 덧붙여하고 있다.

귀찮지만 전처럼 밥 먹는 시간만 되면 부리나케 밥그릇 앞으로 달려가던 아지를 그리워하며 더 많은 노력을 해보려고 한다.

나는 단 한 끼도 대충 먹지 않는데, 나처럼 아지의 모든 식사가 행복하길 바란다.

먹기 위해 사는 우리 모자(母子) 파이팅!

이전 22화 앞서 가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린 아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