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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무지 Feb 16. 2024

폐쇄공포증이 있는 아지

이렇게 끝내긴 아쉬워서

아지는 복 받은 강아지다.

타보지 않은 교통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버스, 지하철, 택시, KTX, 기차, 비행기

너는 정말 살아생전 사람이 할 만한 것들을 다 해보는구나.


아지는 밀폐된 공용 공간에서만큼은 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존재이다.

강아지 알레르기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나에게는 한없이 귀여운 강아지가 남에게는 무서운 존재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아지는 반드시 무언가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유모차가 되었든 강아지 가방이 되었든 말이다.


이렇게 보니 사실 아지 입장에서는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게 복 받은 건 아닌 것 같다.

아지는 어딘가에 들어가 있는 걸 정말 싫어하기 때문이다.

다른 강아지들처럼 밀폐된 공간에서 가만히 있는 걸 1초도 못 참는 미친 개다.

그게 아무리 투명하고 널찍한 공간일지라도,

폐쇄공포증이 있는 강아지처럼 어떻게든 그 공간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래서 집에서는 모든 문을 열어놓아야 하는 룰이 있다.

아지가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가만히 있다가도 문을 닫는 순간 아지는 문을 박박- 긁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이 만든 룰이다.

그래서 아지 때문에 부모님 댁에서는 프라이버시라는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교통수단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이어보자면,

지하철은 노약자들을 위해 엘리베이터가 잘 설치되어 있어서 그나마 편리하다.

'그나마'라고 한 이유는 에스컬레이터와 계단 모두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혼자' 다닐 때와 비교했을 때 불편하니까 '그나마'라는 말을 꼭 붙이고 싶었다.


지하철을 제외한 모든 교통수단은 유모차를 이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가방뿐인데, 아지는 6kg이라 무거워서 내 어깨가 탈골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지하철 외에 다른 교통수단을 선호하지 않는다.


제주도를 갈 때의 일이다.

제주도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행기를 타야 한다.

아지가 비행기를 이용하려면 가방에 들어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털끝 하나 내밀지 못하게끔 지퍼를 꽉- 잠가놓고 좌석 밑에 넣어두어야 한다.


우리 가족은 아지가 어딘가 갇혀있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혼자 집에 두고 제주도 여행을 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수 없이 함께 출발했지만 공항에 도착하니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이다.


첫 번째 두려움은 카운터 방문이었다.

요즘에는 국내선 이용 시, 모바일 탑승권을 많이 이용한다.

그래서 짐을 부치지 않는 이상 카운터에 방문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아지를 데리고 가야 하기 때문에 카운터를 들려야 했다.

강아지의 무게 측정과 짖지 않고 가만히 잘 있는지, 입질이 있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카운터에서 가방에 아지를 넣고 지퍼를 끝까지 잠근 채 컨베이어벨트 위로 아지를 올렸다.

나는 엄마 손을 꼭- 붙잡고 불안한 눈빛으로 아지가 들어있는 가방과 카운터 직원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지는 순간 당황했는지 얼음처럼 굳어 가만히 있었고 직원의 점검을 통과할 수 있었다.


'휴- 다행이다!'라는 속마음과 함께 보안 검색도 하고 탑승구로 룰루랄라 향했지만

남아있는 두 번째 관문, 비행기에 탑승해야 했다.

탑승하기 직전 브리지에서 아지의 얼굴을 억지로 밀어 넣어 가방 문을 꽉- 잠그고는 탑승을 마쳤다.


모든 사람들은 여행과 비행기 두 가지만 생각하면 설렘으로 가득 차겠지만,

나는 그럴 심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아지가 혹여 낑낑대지는 않을까, 짖지는 않을까 하고 모든 신경이 아지에게 쏠려있었다.


좌석 밑에 아지를 넣고 이륙을 할 당시에는 큰 진동과 소음에 놀랐는지 가방 속에서 계속 꿈틀거렸다.

이륙 후에는 긴장이 멈춘 것인지, 포기한 것인지 가만히 있기도 했으나

아지의 진정을 위해 간식도 입에 넣어주고 손만 넣어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제주도에 안전하게 착륙했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비행기에서 하기하자마자 가방문을 열었는데,

아지는 얼굴을 빼꼼 내밀고서는 우리 가족 어느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가방 속에 갇혀 있었던 게 얼마나 싫었던 건지, 우리에게 완전히 삐져버린 것이었다.

내가 눈을 맞추려 고개를 돌리면 다시 고개를 돌려 피하고 화난 강아지 그 자체였다.

어쩜 화난 것도 이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아지는 렌터카를 찾으러 가는 동안 계속 하품을 했다.

강아지에게 하품의 의미는 스트레스이기 때문에,

우리가 좋자고 온 여행에서 아지는 집에 빨리 가고 싶고 피곤하기만 한 것이 된 거다.


우리도 강아지가 갈 수 있는 식당, 카페를 찾아다니고 아지를 챙기느라 제대로 즐기지 못한 건 사실이다.

이로써 다음에 멀리 여행을 가게 된다면, 아지는 두고 오자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저건 가족과 정한 결정이고,

나는 어느 날 문득 제주도를 가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자취방에서 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혼자 갈 수 없었다.


혼자 제주도 여행을 가본 적도 없고 괜히 외로울 것도 같아, 아지를 함께 데리고 떠났다.

2박 3일이었던가, 3박 4일이었던가.

이번에는 아지가 큰 가방에 들어갈 수 있는 가방을 준비했다.

그래서 다행히 이번에 아지는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비행을 즐겼다.

대신 나는 아지의 큰 가방 탓에 훨씬 비좁아진 자리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가야 했다.

그래도 언제나 '나의 편안함보다 네 편안함이 먼저' 아니겠나 하고 편하게 다녀왔다.


가방이 이전보다 큰 덕도 있겠지만, 유모차 타고 워낙 많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 경험 때문에

아지는 이러한 상황이 익숙해졌던 거 같다.

이제는 가족과 멀리 여행을 가도 아지랑 같이 가도 괜찮겠다.

번외로 아지는 가방이 3개나 있다.

회색, 빨간색, 검은색.


회색은 아지가 애기였을 시절에 샀는데, 나름 S, M, L 중에서 L을 산 건데도 아지한테 맞지를 않는다.

나는 여자인데 175cm로 큰 키를 소유하고 있어서 강아지만큼은 작게 키우고 싶었다.

먹는 걸 워낙 좋아하는 나는 작게 키우고 싶은 마음보다 잘 먹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컸고

그렇게 우리 아지 또한 6kg이 넘도록 크고 무겁게 자라 버렸다.

덕분에 회색 가방은 몇 번 쓰지도 못하고 집구석에 있다.

당근에 올렸지만 턱없이 네고해달라는 부탁에 '그냥 안 팔고 말지'라고 했다가 결국 창고 어딘가에 보관됐다.


그리고 빨간색은 한 번도 사용을 안 했다.

그런데 검은색을 왜 샀냐고?

내가 위에서 말했던 '갑자기 떠난 제주 여행' 때문에 애견가방이 필요했는데

빨간색이 부모님 댁에 있어서 가져올 수가 없었다.

생각난 김에 다시 당근에 올려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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