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도 선택할 수 있다.
오전 6시 50분, 아이폰은 나에게 눈을 떠라 울어댄다. 5분만 더. 아니, 10분만 더. 오전 7시가 되어서야 더 이상 알람 소리를 참지 못하고 일어난다. 눈을 비비며 먼저 하는 일은 '끈끈이'의 목줄을 꺼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산책을 하는데, 먼저 목줄을 채우고는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그러나 밖의 날씨는 심상치 않았고, 비가 오고 있음을 확인했다. 혼자 집에 두는 것이 미안해 하루에 두 번 산책은 꼭 해주려고 노력하는데, 비가 와서 나가지 못하는 상황. 나도 속상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끈끈이는 산책 가자고 졸라 댄다.
결국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오늘 아침 산책은 포기했다. 비가 와서 속상한 것은 끈끈이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옷이 젖는 것과 습기 때문에 쩍 쩍 살이 달라붙는 것을 싫어하기에 비 내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평생 비가 없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있다. 전 지구를 돔 구장처럼 둘러싸서 '비가 필요한 곳에만 내릴 수 있게 장치하면 이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망상했던 적도 있을 만큼 비 내리는 것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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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가지 못하니 다음 루틴을 시행한다. 뉴스를 보면서 샤워를 한다. 뉴스에서는 특집으로 가뭄 관련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오늘 남부 지방에는 비가 왔지만, 뉴스에 나오는 농촌 지역에서는 땅이 갈라질 정도로 비가 오지 않아 작물 재배가 힘든 현실이 전파를 탔다. 최근까지 연일 보도되었던 내용은 동해, 경남의 산불이었다. 강풍과 건조한 기후는 불을 계속 키웠다. 어떤 사람에게는 간절했던 비가, 누군가에게는 전혀 필요치 않다. 조건에 따라 비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 내게는 비가 와서 슬픔을 줬지만, 농사를 지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비가 오지 않아서 슬픔을 줬다.
만약 우리 집이 불타고 있다면, 비가 싫었을까? '전자제품들이 물에 젖어 고장 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은 되겠지만, 피해가 늘어나지 않음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같이 탈출했다는 가정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만약 '끈끈이'가 집에서 나오지 못한 상황이라면 슬픔을 넘어 오히려 절망에 이를 것이다.
나는 비로 인해 하루의 기분을 선택할 수 있다. 비 때문에 옷이 젖거나 습기로 인해 기껏 드라이 한 머리가 엉망이 되는 것을 가정한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비 덕분에 옷이 젖을 것이 분명하므로 복장을 가볍게 한다거나 오늘만큼은 파마한 것처럼 부스스하게 머리를 세팅한다고 가정하면, 오늘은 특별한 날처럼 기분 좋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시 오지 않을 내 삶의 소중한 하루를 좋은 시간으로 보낼 수 있다.
'비'라는 조건은 언제나 싫을 수 없다. '비'는 내가 처해있는 상황, 기분, 조건, 관계 등에 따라 좋을 수도 싫을 수도 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에 따라 설렘 가득한 하루가 될 수도, 하루 종일 꿀꿀한 채 지낼 수도 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고,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내 기분이 달라진다. 때로는 기분이 결과까지 바꿀 수 있다. 내 삶이 좋은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는 오로지 내게 달렸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이렇게 생각하고 바라보았다. '비'가 온다는 것은 산책하는 30분을 더 잘 수 있다는 것이며, 공기에 있는 미세먼지가 씻겨 나간다는 것이며, 괜히 감성을 자극해서 글감이 떠오르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며, 집에 시무룩해 있을 끈끈이가 더 애틋해진다는 것이며, 비와 잘 어울리는 음식을 별미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점심, '비'가 온 덕분에 칼국수를 먹었다. '비'를 맞아 옷이 젖었음에도 웃을 수 있었고, '비'가 온 덕분에 친구와의 점심시간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다. '비' 때문이 아니라, '비'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