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주의력이 지닌 힘은 대단하다. 내면의 괴로움들을 상상하고 떠올림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상처, 몸부림, 갈등 등을 매만질 수 있다.
-잭콘 필드(Jack Kornfield)-
50대는 피로하다. 진정한 자신을 숨긴 채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온 지 50년이나 된다. 좋은 일, 마음에 드는 사람만 만날 수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 사람을 만나고 역할을 맡아야 했다. 직장과 사업장에서 만나는 인간관계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가정에서의 남편, 아내, 부모로서 역할을 하는데도 참 풀기 어려운 관계 방정식이다. 이런 문제를 푸는 방법을 학교에서 공부해본 적도 없다. 직장은 시스템에 따라 정해진 조건 속에서만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가끔 착각에 빠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자신과 회사를 동일시해서 충성을 바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충격을 받는다. 회사가 자신에게 이럴 줄 몰랐다고 원망하는 순간 깨닫는다. 50년 동안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차곡차곡 내려앉은 상처는 바위처럼 단단하다.
50대에는 이전에 풀지 못하고 마음속에 엉킨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내야 할 시기다. 50 이전에 마음속에 쌓인 상처는 얌전하게 그냥 가만히 있지 않는다. 50 이후 마주하는 모든 자극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영향력을 행사한다. 마음속에 쌓인 상처는 풀리지 않고 응축된 에너지를 품고 있다. 몸과 마음에 응축된 에너지는 몸과 마음을 긴장시키고 예민하게 만든다. 또다시 상처받지 않을까 미리 걱정하고, 지나간 상처를 곱씹으며 긴장하고 분노한다. 수시로 떠오르는 상처의 기억으로 수면, 면역, 신경계, 호르몬이 방해받는다. 몸의 생리적 균형과 심리적인 유연성이 무너진다. 불면증, 화병, 공황, 공포증, 심장 부정맥, 치열 등 신체적 문제가 나타난다.
인간도 동물들처럼 본능적으로 스트레스 에너지를 푸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야생의 동물들은 포식자로부터 쫓기다가 겨우 살아난다. 곧바로 동물들은 날개 짓으로 푸드덕거리거나 몸을 부르르 떨면서 몸에 남아 있는 스트레스 에너지를 빼낸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리 속으로 유유히 들어간다. 사람은 상처를 받으면 그것을 기억하고 마음속에 쌓아둔다. 유사한 자극을 받으면 그 상처의 경험을 되새긴다. 동물들처럼 그때마다 스트레스 에너지를 풀지 못하고 기억으로 저장해둔다. 생존을 위해 그 기억을 되새기며 내 주위에 안전장치와 보호장치를 성처럼 높게 쌓아간다. 누에고치가 자기 스스로 자기가 지은 집 속에 갇혀버리는 상태가 된다.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는 50에는 자기 탐구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기 안에 무엇이 엉켜 있는지 알아차리고 풀고 가지 않으면 50 이후의 삶에 엄청난 짐이 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채우지 못한 욕구와 상처는 이후에 경험하는 스트레스와 상처에 더 민감하게 과잉반응하게 만든다. 마음속에 풀지 못하고 서로 엉켜 있는 기억은 하나가 건드려지면 전체가 출렁거린다. 채우지 못한 욕구나 상처를 풀어내어 에너지를 빼지 않으면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반복해서 만들어 갈 수 있다. 내가 심리 상담에서 만난 사람들도 상담 초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감시자인 동시에 타인에 대한 비난자였다. 상담이 깊어질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자로 바뀌어 갔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친절하게 보듬어주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 욕구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서 자신의 현재 갈등을 더 분별력 있게 바라보고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 작업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담에서 만난 분들로부터 늘 배움을 얻는다. 저와 같이하신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린다! 나도 40대 중반에 상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변화를 경험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내가 경험했던 생각과 감정, 욕구, 신체 감각, 그리고 내 속을 들여다보고 풀어내는 과정, 내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글로 옮겨본다.
“(당시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나는 불면증으로 밤에 잠자는 것이 괴로웠다. 심장이 갑자기 멈출까 두려워 열 발자국 걷는 것도 힘들어서 가다가 앉아서 쉬어야 했다. 화가 올라와서 하루 종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을 헐떡거렸다. 마음속에서는 적개심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허무함,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느낌,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 사물이 뿌옇게 보였다. 회색빛이었다. 아무런 의욕도 없었다. 살아야 할 의미도 없었다. 그냥 무덤덤했다. 내 옆에서 잠을 자는 아내와 자식들마저도 다른 사람처럼 생경하게 느껴졌다. 나는 가족과 세상과의 단절의 준비를 해나갔다. 그럴수록 마음속은 오히려 차분하고 담담해졌다.
(자기 탐색 과정) 마음속에 어린 시절부터 나도 모르게 쌓아온 온갖 기억들이 생생하게 올라왔다. 어떤 기억은 마주하자마자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어려서부터 동네 아이들과 비교해서 몸집이 작고 힘도 약해서 신체적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달리기, 술래잡기, 물놀이할 때 늘 자신이 없었다. 동네에서 축구를 할 때는 끼지 못하고 늘 구경만 했던 기억이 올라왔다. ‘나는 쓸모가 없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올라올 때는 속이 쓰렸다. ‘나 혼자 소외당했구나’라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창피함이 올라왔다. 나는 동네 형들이나 또래들과 몸으로 하는 놀이는 어느 것 하나 두렵지 않은 것이 없었다. 두려움을 안고 이를 악물고 따라 하려고 애를 썼다. 다른 애들을 따라 하지 않으면 무리에 끼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은 조였다가 풀어지기도 했다. 잠을 자는 것이 편하게 느껴졌다. 답답하던 가슴도 훨씬 시원해진 느낌이다. 걸을 때 열 발자국도 못가 숨이 차서 힘들었는데, 30분 정도는 걸을 수 있게 됐다. 힘들게 느껴졌던 병원 치료도 2년 동안 어렵지 않게 받았다. 그렇게 빠르게 뛰던 심장도 안정되었다. 이전에는 내게 피해를 준 사람들이 먼발치에서 보이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내가 피해서 돌아갔다. 심리적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나를 자책했다. 나를 탐색하면서부터 그들을 먼발치에서 보더라도 불편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그들을 향해 걸어가서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다. 그들이 먼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면 나는 그냥 담담하게 인사를 받아줄 수 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좀 더 환하게 바뀌었다. 꼭 꿈을 꾸고 일어난 것 같다. 꿈속에서 내 몸과 마음이 쇠사슬에 꽁꽁 묶여 옴짝달싹 못 하다가 풀려난 느낌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Na’vi)족의 인사 ‘I See You’는 ‘나는 당신을 봅니다’이다. 선입견, 고정관념, 욕구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본다는 의미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주관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그 대상의 순수한 본질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마음에 쌓인 과거 기억의 거미줄을 걷어내고 나와 세상을 보는 것이다. 장미를 바르게 볼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골목 담장에 피어있는 ‘장미꽃을 본다(I See Rose)’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탐색하는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이 많다. 생활 속에서 긴장을 덜 한다. 열등감을 창피함 없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완벽주의 욕구가 올라올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들이 심리적 외상을 겪었거나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빠져 있을 때 자기 탐색의 방법으로 활용되는 심리적 개입법은 다양하다. 심리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누구에게는 노출(disclosure)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나, 상담자, 성직자, 친한 친구, 신(神) 등에게 노출할 수도 있다. 심리 치유에서 자기 자신을 노출할 때 나타나는 치유 효과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밝힌 심리학자들이 있다. 심리학자들은 치유 효과가 나타나려면 노출할 때 노출자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한다. 가장 안전할 수 있는 조건은 자기 자신에게 노출하는 방법이다. 자신이 풀어놓는 내면의 경험을 누구도 알지 못하고 비밀이 새어 나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을 자기 노출(self-disclosure) 또는 속마음 풀기(letting-go)라고 한다.
자기 노출 기법은 자신의 의식 공간에 심상(imagery)과 기억을 의도적으로 불러와서 직면시키는 방법이다. 심리적인 문제의 악순환 고리에 걸려드는 것은 심리적 외상이나 스트레스의 경험을 회피하고 억누르고 대체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억누르고 회피했던 경험을 안전한 방법으로 직면하는 자기 노출을 통해 심리적인 문제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자기 노출은 마음속에 풀지 못하고 뒤엉켜 있는 어두운 기억과 심상을 햇빛에 드러내는 것이다. 어두운 그림자에 놀라서 숨고 피해 다니지 않기 위해서다. 50 이전까지 사회적 역할을 하면서 가지고 있던, 가면, 가식, 방어, 겉치레, 열등감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자신을 볼 수 있게 한다. 50 이후의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수용하기 위해 50 이전의 나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
(Tip! 자기 탐색을 위한 질문: 숙고를 통해 진정한 나를 만나보는 과정)
○ 지금 나는 누구인가? 이름이 나인가? 누구의 아들, 딸이 나인가? 누구의 남편, 아내가 나인가? 누구의 아버지, 어머니가 나인가? 누구의 형, 누나, 동생이 나인가? 누구의 친구가 나인가? 어떤 회사의 직원이 나인가? 사장이 나인가? 어떤 상사의 부하가 나인가? 어떤 부하의 상사가 나인가? 사회적 지위가 나인가? 내 명함에 박힌 글자들이 나인가?(그것들을 거꾸로 하나씩 떼어낼 때 남는 무엇이 있는가? 그 남는 것은 누구인가? 숙고해본다.)
○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그곳을 떠올릴 때 뿌듯한 것은? 아쉽고 채우지 못한 것은?
○ 내가 지금까지 이룬 것은? 좌절한 것은? 부족하고 아쉬운 것은? 후회되는 것은? 풀지 못한 원한이 있는가?
○ 어릴 적 나와 부모님의 관계는? 형제와의 관계는? 친구와의 관계는?
어릴 적 나의 신체적 조건은? 우월한 것이 있었는가? 열등한(뒤쳐지는) 것이 있었는가? 이것이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완벽 성향과 지나친 성실함과 연관되는가? 외로움, 소외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가? 거절, 배신감에 민감한 것과 관련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