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지 않은 길은 궁금하다. 어떤 모습인지 두렵기도 하고 사람이 살 만한 곳인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한때 내게 마흔 살도 그런 의미였다.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었고, 있어도 옳은 답일 리가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누가 알겠는가? 마흔 살의 내 모습이 어떨지? 그건 오직 진짜 마흔이 된 나만 알 수 있는 일이다.
언젠가 까마득한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서른 살이 될 때도 그랬다. 두렵고 불안했지만 막상 서른이 되고 나서는 서른 살의 삶이 어떤지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엄청난 속도로 지나갈 뿐이다. 서른은 여전히 불안했다. 이십 대에 안정을 찾을 줄 알았건만 서른이 되도록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스물아홉에 어린 시절부터 꿈을 이룬 친구에게 물었다. “혹시 이십대로 돌아가면 뭐 하고 싶어?” 친구는 “무슨 소리야 나는 이십 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때는 친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역시 꿈을 이룬 사람은 다르네.’라고 생각했다. 그 친구의 이십 대는 전쟁터였고 성취를 위한 투쟁이었으며 목표로 이루었으니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그 친구는 꿈을 이루어서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간혹 장래 희망을 이야기할 때 미래에 되고 싶은 직업과 꿈을 헷갈려 하지만 직업은 꿈이 될 수 없다. 소위 성공했다고 말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이십 대 후반이면 직업을 성취한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그들이 직업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들은 여전히 사회 초년생에 불과하며, 그곳에서 더 치열한 경쟁을 만난다.
놀랍게도 마흔에는 마흔의 행복이 있다. 무언가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 않았더라도 나이가 들어 외모나 신체적 능력이 예전 같지 않더라도 마흔에는 마흔만의 매력이 있다. 그래서 이십 대의 외모와 건강을 준다면 당장 오케이 하겠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글쎄다. 의외로 선택은 쉽지 않다. 아마도 그 친구의 서른이 그랬으리라.
마흔 살을 앞둔 조금 두려울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마흔이 돼도 폭탄은 터지지 않는다. 어떠한 급작스러운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다만 약간의 몸의 변화와 함께 생각이 달라진다. 이해가지 않던 어른들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고, 전보다 조그만 행복에 감사하게 된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꽃이 예뻐 보이기 시작하면 나이가 든 거야.”
봄이 되고 꽃이 피는 사소한 계절 변화가 문득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곳, 그곳이 마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