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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곰돌이 Jul 12. 2023

고생 끝에 낙(樂)이 온다.

6.12~15

6월 12일 월요일



일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회 경험이 얼마 없을 땐 일을 정확하고 빠르게 하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고 경력이 올라가면서 일을 잘한다는 것이 이런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일을 잘한다는 것은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객관화해서 판단하는 능력이다.


모든 일은 누구나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한된 시간과 환경에서 능력 이상의 일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풀어나갈지 길을 아는 건 일머리 즉, 능력이다.


이 일이 몇 시간이 걸릴지,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는지, 쉬울지 어려울지 빨리 파악하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이라는 걸 몇 년의 직장인 체험에 걸쳐 깨닫게 되었다.


(직장인이 직장인 체험이라고 쓴 이유는 정말 직장이 체험으로 끝나버려 경제적 자유와 물리적, 금전적 자유를 얻기 바라는 직장인의 슬픈 초상화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 주, 나는 남은 일과 남은 시간을 바탕으로 어떻게 해야 일을 효과적으로 다 끝낼 수 있을지 계산해야 했다.


납품은 목요일이었고 나에겐 월, 화, 수, 목 4일의 업무 시간과 월, 화, 수의 야근 시간이 주어져 있었다.


계획하는 J로서 남은 일들을 봤을 때 아슬아슬하게 일을 끝낼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섰다.


자, 이제 계획을 실행으로만 옮기면 된다.


하지만 언제나 늘 그렇듯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실행.


침대에 눕는 실행은 잘 되지만, 일하는 실행은 좀처럼 되지 않는 K-직장인이다.



2시간 야근 후 퇴근길 저녁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난 너를 사랑해~ 이 세상은 너뿐이야~ 소리쳐 부르지만~ 저 대답 없는 노을만 붉게 타는데~'


이문세 - 붉은 노을


빛의 파장과 산란으로 하늘이 붉은빛을 띠게 되는 노을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과적인 생각과 함께 나의 퇴근을 반겨주는 폭죽 같아 보인다는 문과적 감성이 동시에 마음속에서 일렁거렸다.


물과 기름처럼 좀처럼 섞이지 않는 이과와 문과 감성이다.



아직 지지 않은 석양에 기대 즐거운 퇴근을 하려고 차에 타려는 순간 못 볼 것을 발견했다.


왼쪽 뒷바퀴 위에 흰색이 묻어 있기에 또 새똥인가 하고 자세히 쳐다봤는데 불행하게도 새똥은 아니었다.


심한 문콕 자국이었다.


하얀색 페인트가 거세게 묻어 있으면서 흠집이 난 차의 모습을 보고 석양을 바라보던 기쁨은 0.1초 만에 증발되었다.


블랙박스를 샅샅이 뒤졌지만 충격 영상엔 문콕당한 순간이 나와 있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큰 한숨을 내쉬었다.


재수가 없어 똥을 밟았거니 생각하고 다람쥐 새댁이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차를 몰았다.


차를 좀 더 소중히 해야겠다.


10년은 더 타야 할 텐데.




6월 13일 화요일



시간에 쫓기다 보니까 하루가 지난 것이 매우 크게 다가온다.


멀게만 보였던 쓰나미가 산처럼 다가온 기분이다.



그래도 아침 수영은 포기할 수 없다.


수영의 개운함을 동력 삼아 다시 일을 시작해 본다.


줄어들지 않는 마법의 일의 샘 속에 빠져든 것 같다.


사막의 오아시스 신기루처럼 눈에 보일듯하여 다가가면 사라지고 또 다가가면 사라진다.


언제쯤 오아시스에 도착해 끝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사치일 뿐 몸은 쉴 새 없이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 그 어중간한 세계 가운데에서 로봇처럼 로봇과 관련된 특허를 처리한다.


내가 하는 일의 장점은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오롯이 스스로 일을 한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천상천하 유아독존 같은 무림 고수의 마음처럼 홀로 이겨내야 한다.


다행인 것은 내공이 많이 쌓여 어쨌든 일은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무조건 일을 끝내야 하지만.



배를 채워야 일을 할 수 있는 동력을 얻기에 밥을 먹는다.


마치 이것은 살기 위해 먹는 것과 비슷하다.


그냥 저녁시간이 되었으니 영양소라는 걸 위장에 담아본다.


그런데, 맛있다 미소야 '옛날식 달콤한 로스카츠'.


2시간의 야근이 끝나고서야 퇴근을 한다.


미리 일을 더 하면 좋겠지만 몸과 마음은 언제나 따로 놀기에 그 합일점을 찾기는 어렵다.



집에 도착해 어머님이 주신 수박을 맛있게 잘라먹었다.


우리 집 소파 테이블 위에는 뿌리가 썩어 떨어져 나간 금전수 줄기 두 개가 화분 속에 물을 머금고 있다.


한 줄기는 벌써 뿌리가 나고 있고, 다른 한 줄기는 이제 막 입소한 신생아다.


금전수 줄기를 잘라 물속에 담가 놓으면 뿌리가 나고, 뿌리가 나면 다시 흙으로 옮겨 심으면 살아난다는 블로그의 글을 읽고 시도해 봤는데 정말 뿌리가 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식물의 끈질긴 생명력에 자연의 신비함을 느꼈다.


집 안에 있는 다른 화분들도 잘 키워서 화사한 집 분위기를 잘 유지해 봐야겠다.



사람은 무언가를 돌보면서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내가 돌보는 것들 중에는 여러 식물이 있다.


종종 잘 크는 식물을 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역시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찾아가면 되는 것일 뿐.


다른 좋은 행복들 속에 행복이 숨어 있다가 '못 찾겠다 꾀꼬리' 소리를 듣고 튀어나온 기분이다.


또 다른 숨은 행복을 찾아보자.


하지만 행복을 좇으면 행복해지지 않는 행복의 아이러니가 있으니 조심하자.


언제나 행복이 가득하길.


"May you always be full of happiness."




6월 14일 수요일



D-1


"아직 한 발 남았다."


이번 달은 유독 일의 양이 많다.


그래서 평소 예상 시간보다 계속해서 시간이 초과되고 있다.


계획을 전면 수정한다.


오늘은 늦게까지 야근이다.


매시간 일은 톱니바퀴 돌아가듯 착실하게 돌아가고 있다.


다만 감속기어의 기어비가 많은지 최종 진도 기어가 잘 돌아가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까진 계산 범위 안이다.




회사 앞에는 정말 먹을 음식이 없다.


지난주엔 김밥을 너무 먹어서 도저히 김밥 생각이 나지 않는다.


미소야에서 메밀국수와 돈카츠 세트를 먹으며 야근할 체력을 보충해 본다.


이렇게 야근하는 날 야구라도 잘하면 즐겁게 야근할 수 있을 텐데 한화는 역시나 죽을 쑤고 있다.


잘하는가 싶더니 갑작스러운 더위에 다들 체력이 부족한지 최근 경기력은 처참할 지경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한화 팬인걸.


시간은 계속 흘러 어느덧 9시가 지나고 있다.


하지만 많이 남았다.


다행히 머리 쓰는 구성 대비는 모두 끝내놨고 남은 건 복붙만 엄청 해야 하는 보고서들만 남았다.


가장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일을 좀 더 하고 가면 좋으련만 정신력이 바닥나버려 퇴근을 결심했다.


깜깜한 골목길을 터벅터벅 걸어 차로 향한다.


역시나 납품주에는 일에 대한 고통의 글들로 가득하다.


고통이라기보다는 사실 지침이 좀 더 맞는 표현 같다.


다 함께 불러보자.


"난 이제 지쳤어요 땡뻘!!!"


"땡뻘!!!"




6월 15일 목요일



D-DAY


납품일이다.


수영을 하지 말고 출근을 해서 일을 할지, 아니면 수영의 개운함을 느끼고 그걸 동력 삼아 일을 더 열심히 할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방법을 지현이가 조언해 주었다.


수영장에 조금 일찍 입수해 30분만 수영하고 일찍 나와 출근해서 일을 좀 더 일찍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딱 30분만 수영을 하고 나왔다.


30분 밖에 안 해서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상쾌함을 얻었기에 출사표를 던진 제갈량의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었다.


손이 부서져라 Ctrl+c, Ctrl+v를 눌렀다.


손가락이 저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게토레이 네버 스탑!'


예상 마감 시간은 2시였으나 시간은 점점 옥수수처럼 불어나 어느덧 4시가 되었다.


4시 15분 드디어 마지막 일을 끝내는 엔터를 눌렀다.


역시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했던가, 배수의 진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4시 반 퇴근을 하면서 속이 후련해졌다.


역시 일이 많든 적든 납품은 하게 된다.


저녁은 문주부 요리를 만들어 먹기 보다 고생한 우리를 위한 선물로 특별히 외식을 하기로 결정했다.



집 앞 '별봉구이'에서 막창을 주문했다.


"오빠 첫 잔은 소맥이겠죠~!"


달짝지근한 소맥이 목 안으로 넘어가는 순간 오늘 하루의 고됨이 함께 씻겨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크~


"바로 이 맛 아닙니까-."


막창의 쫄깃함과 소맥의 청량함과 대낮부터 시작되는 저녁과 그리고 앞자리의 지현이까지


이보다 완벽한 외식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2차까지 달려본다.


2차는 항상 가보자고 이야기했던 꼬치집이다.


모둠 꼬치를 시키고 소주 한 병을 나눠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하호호


하하호호



2차를 마치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하직 해가 떠 있는 밝은 날이다.


마치 낮술을 마신 듯 기분이 좋아졌다.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한 개씩 손에 들고 산책을 하는데 지현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악!!!!!"


깜짝 놀라 쳐다보니 지현이가 땅바닥을 쳐다보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의 큰 초콜릿 덩어리가 떨어졌다.


초코 사냥꾼의 억장이 무너지는 모습에 웃겨서 증거물로 사진을 찍었다.



오늘 납품 끝 축하 파티는 3차까지 이어졌다.


냉장고에 두 달 동안 묶혀있던 선양 소주를 꺼내고


어포와 수박을 안주 삼아


페루에서 산 위스키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한화는 역시나 야구를 못했고 우리의 분위기는 즐거웠다.


내일은 출근도 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있을 수 없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낙(樂)의 시작이다.


"knock, kn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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