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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민 Oct 29. 2021

문탠로드 숲

부산을 말하다

숲의 가을 / 그림 이종민



‘문탠로드’숲에 서면, 간혹 보이는 검은 비닐봉지와 경사 10도도 채 안 되는 숲길에서 숨을 헐떡이는 나의 부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긍정적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둘씩 걸으면서 입을 한시도 쉬지 않는다. 집에서도 입과 귀가 저리 분주했을까? 그 분주의 흥분으로 말미암아 가끔 걸음이 꼬이기도 하는데, 이 엇박자 또한 환희의 리듬이다. 갑자기 와글거려 살피면 교과서 없는 수업이 숲 속에서 펼치고 있다. 말 그대로 자유이며 학습하는 학생들은 여전히 핸드폰 액정을 쳐다보지만, 간간이 파도 소리와 숲이 두런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려 고개를 들기도 한다. 그 회수가 분명히 숲으로 들어올 때보다 잦아졌으니 이 생각 있는 선생님께서 펼치는 묵언의 수업 또한 매우 긍정적이다. 


  연분홍 재킷의 부인과 물색 추리닝을 걸친 남편이 길 위의 벤치에 오래전부터 앉아 있었고 내가 그 자리로 향하니 '우리! 이제 일어나지."하고 자리를 비킨다. 애쓰지 않아도 내 자리가 생겼다. 숲 밖에서는 좀체 없던 일이다. 옆의 벤치에는 늙은 아버지와 중년의 아들이 않았는데, 주식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다. 그저 주가가 많이 내리지만 않았으면 다행이라는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나는 세상의 소요가 늘 그런 정도이길 바랐다. 사람들은 바다를 향하여 트인 장소를 만들고 의자를 놓았다. 나는 눈부신 바다에서 가급적 멀리 앉기로 하였다. 나는 바다를 바라보는 일보다 숲을 느끼는 시간이 훨씬 좋았다.


  숲의 기억은 숲에서 떠올리는 게 정확하다. 샛바람에 부딪히는 솔잎의 수런거림과 할머니가‘갈비’라고 부른 솔 낙엽의 푹신거림이 공존하던 그런 곰솔 숲에 든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다른 세계로의 이동경험이었다. 빛과 냄새와 촉감이 순간 바뀌어서 어서 빠져나가야지 했지만, 숲은 나를 점점 깊이 빨아들였다. 그러나 막상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앉고 싶기도 하였으니, 숲은 무서움과 편안함과 그 외의 것들이 적절하게 섞인 다중인격체였다. 숲은 나의 키보다 몇십 배의 높이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무섬증이 많던 그때에 올려다볼 용기를 준 것은 오히려 그 숲의 정점이었다. 세상에 크고 높은 것이 있음을 그때에 알았다. 


  때론 혼자였으므로 숲에서의 모든 느낌은 더 세밀하였다. 나무와 그의 지휘하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은 언제든지 나를 두려움으로부터 무장해제시키는 데에 열중하였다. 숲은 먼저 그들이 입은 것과 같은 종류의 서늘한 공기 옷을 재빨리 내게 갈아 입혔다. 그러고 난 후면 보이지 않게 움직이던 모든 것들은 (땅에 뿌리를 박고 있던 것들을 포함하여 그것들은 순한 것들이었다.) 잠시 소리를 죽이다가, 나의 선함을 확인하고 다시 평소의 두런거림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가끔 풀무치와 귀뚜라미 같은 미물들이 은근슬쩍 제 모습을 내게 보였고, 그것들을 가까이서 보려고 깡총거리던 나의 발걸음마저 같이 어울려 점점 하나의 숲이 되고 있었다.

 

  더 깊이 들면 사위가 어두워지면 무섬증 또한 커졌으나, 다행인 것은 하얀 띠 모양으로 길게 뻗은 뿌연 직선을 따라가면, 곧 밝은 세상이 나타나는 어떤 확신을 믿게 된 것이다. 숲에는 어둠과 빛이 항시 공존함으로 잠시 어두워져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란 것을 일깨워 주던 경험이었다. 깊으면 깊을수록 무수한 빛과 소리가 명멸하곤 하였는데 그건 확연히 다른 세상이었다. 몇몇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는 해가 가면서 익숙하였지만, 끝내 알 수 없는 소리가 더 많았다. 또 잠시 정신을 팔면 그 많던 소리는 일시에 사라지고 한없이 적막함이 찾아드는 곳이 숲이었다. 그러한 적막은 적당할 즈음에 끝없이 나아가던 나의 상상을 제어시키려 가슴을 쿵 내려앉게도 만들었다.    소꼴이라도 먹이고 있을 때에는 정신을 팔지 말아야겠다고 원망하던 그런 적막함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날이면 그 적막함이 다시 그리워서, 반대편의 숲에서 또 정신을 팔곤 하였다. 나는 그런 감정의 반복이 좋았다.   


  철이 든 이후의 숲은 이랬다. 언젠가 금강식물원에서 남긴 스케치를 보면, “숲은 장엄함이다. 나는 비록 작지만 내가 그 속에 있으므로 더불어 장엄할 수 있다.”라고 썼다. 내가 숲을 숲이라 부를 수 있음은 그 안에 내가 있을 때였다. 오로지 그 때에만 숲이라 부르는 것이 맞고, 나는 숲 밖에서 그렇게 부를 숲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혹 아마존의 상공에서 떠 있다고 가정하여, 내 수평의 시계가 그 숲을 짐작할 수 없을 때는 그렇게 부를지도 모른다. 그건 나의 경험이 일천한 탓이다. 혹은 나의 관점이 아직 우주적이지 못한 탓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딱히 욕심내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숲이라도 내가 숲 속에 들어서면 숲은 곧 내가 포한된 하나의 실존으로서의 거대한 숲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숲은 나를 온전히 품어줌으로써 유일하게 나의 정신 체계를 제압할 자격이 있는 곳이다. 그리하여 나는 숲의 크기를 논하지 않았다. 내가 자주 드나드는 작은 숲이 비록 인공이며 작위적이라는 선입견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숲은 늘 인공이길 거부한다는 몸짓을 내게 보여줌으로써 아무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한다. 세밀히 보면 사람들이 심은 나무는 느린 속도로 서서히 서서히 인공으로부터 회향하여 숲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숲을 가꾼다고 말하지만, 실은 숲이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다. 숲은 작아도 숲이고 커도 생각하는 만큼의 숲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의 숲도 얕볼 일이 아니다. 도시의 숲은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아 그저 그럴 것 같지만, 나는 오늘 곳곳에서 숲의 반항을 읽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가꾸어 놓아도 숲은 제 본연의 모습으로 회향하는 능력이 있다. 숲은 숲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 숲에서 만난 그 모두 중에서 숲이 가장 긍정적이다. 오늘의 이 ‘문탠로드’의 작은 숲도 내게는 어김없이 장엄한 숲이다. 굳이 사람과 바다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숲이 스스로 힘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끔 숲에 들어야 함은 삶의 의미 있는 절차다. 다만, 내가 더욱 온전하게 이 숲과 어울리지 못했다면, 좀체 근원으로 회향하지 못하는, 말하자면 삶의 작은 부스러기를 향한 나의 욕심 때문이다. 사실은 더 많은 원시적인 생각과 감각을 대범하게 숲과 공유했어야 옳다. 숲과 맞설 자격이 아직도 부족한 것이다. 무던히 글을 쓰고 책을 읽었지만, 본연을 찾아내기가 그리 쉽던가. 그리하여, 아직 내가 숲에 더 오래 머물기를 바란다면, 그건 그런 온전한 회향에로의 갈망이다. 


  저만치 등산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중년의 부부가 온다. 이제 내가 자리를 비킬 차례다. 오르막길을 오르다 위의 길을 쳐다보니 야생고양이 한 마리가 얼음이 된 채로 나를 내려다본다. 숲에서 만난 놈치고는 토실토실 살이 올라 혹 다이어트용 산책을 하러 나왔다가 길을 잃고 내가 얼마 전까지 저와 함께 기거하던 사람이나 아닐까 쳐다보는 중인지도 모른다. 내가 먼저 눈을 돌리고 말았다. 저는 목적이 있었겠으나, 나는 우연히 본 것이므로 내가 먼저 눈을 돌리는 게 맞다. 내가 오늘 이루려던 것도 목적 없이 사물을 관찰하는 연습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게 그리 쉽지 않았다. 나는 곧 숲을 벗어날 궁리를 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도 저놈이 다이어트를 마치고 살이 내리더라도 산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었다. 숲을 되돌아본다. 숲에 앉아 그대로 숲이 된 사람은 있을까?     


* 문탠로드 / 해운대 달맞이 언덕의 숲과 인공으로 꾸민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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