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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민 Oct 25. 2021

아미산전망대

부산을 말하다

아미산전망대 / 그림 이종민



‘김호선’ 감독의 영화 ‘겨울여자’ 가 남포동 ‘부영극장’에서 공전의 히트를 하고 있었다. 눈 내리는 풍경이 있는 성탄절 카드를 주고받으며 난로 가에 둘러앉아 이성과의 새로운 만남 혹은 사귀던 여자 친구와의 좀 더 진전된 관계를 저마다 고대하며 설레던 그런 계절이었다고나 할까. 여주인공이 군에 입대하는 남자를 전송하던 열차라든지, 겨울 나그네를 닮은 선배의 모습을 흠모하면서 서 있던 영화의 장면들이 스무 살 앳된 낭만에 하염없이 불을 지피곤 하였다. 

  가슴속 열기를 차마 다 풀지 못하면, 우리는 마침내 강변으로 가곤 하였다. 그곳은 수시로 막차 시간을 살펴야 하는, 도시이기보다는 오히려 강이나 바다에 속한 곳이어서 더욱더 격리감을 느끼던 곳이었다. 이름이 왜 '에덴공원'이라 불리었는지는 모른 채 말의 뉘앙스에 늘 가슴 설레었다. 영화 ‘에덴의 동쪽’을 떠올렸을까? 하기야, 우리 중의 어떤 부류는 ‘제임스-딘’의 냉소적 표정에 한껏 심취해 있기도 하였다.

 작은 발동기를 단 목선의 선주는 일행을 모래와 바람에 잘 견디는 키가 낮은 풀들이 드문드문 있는 하얀 섬 ‘백합도’에 내려주었다. 섬으로 분류되었지만, 조수 간만에 의하여 수시로 그 모습을 바꾸던 모래톱은 강의 밑바닥과 한가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오히려 강의 일부라는 게 옳았다.

 “섬은 고독이 아니라 비밀이다.” ‘장-그르니에’의 말처럼, 발동기 선장과 타협할 때부터 이미 우리를 육지로부터 격리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이 섬에 들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쫓겨 온종일 새들의 흔적을 찾는 데에 분주하였다. 조개껍데기를 주우며 깔깔거리고 간혹 발견되는 하얀 돌을 주워 물수제비를 뜨곤 하면서 한나절을 해방감으로 보내던 우리는 ‘로빈슨-크루소’였다.      

  예감대로 ‘장-그르니에’ 식의 비밀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그게 인생의 진짜 비밀이었다. 그러나 모래톱의 바람은 남포동의 열기와 함께 우리의 이십대를 숙성시키던 것이어서, 겨울이 오면 어떤 그리움으로 화하여 지금의 나를 혼곤하게 덮치곤 한다. 

  삼십 년을 훌쩍 넘긴 어느 날, 지하철 1호선에서 내려 강변을 따라 을숙도를 지나 다대포 쪽으로 걸으면 오른편에 백합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 디뎠던 발의 촉감 대신에 새들이 내려앉는 모습으로 대개 섬의 위치와 크기를 짐작하는데 여전히 꽤 길었던 그 모래톱인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큰 변화는 강의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기 싫어진 것으로. “이곳에 왜 무지막지한 아파트 단지를 만들었지?”와 같은 나의 건축적 도시적 견해가 생긴 것이다. 그것은 아파트 때문에 더 하류로 밀려 내려가야만 하는 철새들의 고단한 날갯짓만큼이나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다.      

  아파트 사이를 돌아 언덕을 오르면, 한때 예배당보다 탐조探鳥의 장소로 더 이름을 날리던 ‘몰운대 성당’ 옆으로 칼처럼 뾰족한 현대식 건물이 하늘을 향해 머리를 세우고 있는데, 작지만 위세가  당당하여 좋은 건축의 풍모를 과시한다. 건축가 ‘손숙희’가 설계한 ‘아미산 전망대'이다. 

  나는 대체로 자연의 흐름에 거슬러 세워진 인공의 위세를 싫어한다. 그러나 몇 군데의 예외가 있었는데, 한강 변 ‘절두산’에 세워진 ‘김대건 기념관’과 ‘리우데자네이루’의 언덕에 세워진 예수상이 그렇다. 건축의 이미지를 압도할 만큼의 정신적 행위가 그 장소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탐조探鳥란 무척 의미 있는 행위이다. 새의 먹이 짓을 바라보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애착하는 일이며, 계절에 따라 철새의 오고 감을 관찰하는 것은 인간의 시원을 사유케 하는 매우 철학적인 행위이다. 거기에 보태어서, 태양의 침잠이 모래톱 혹은 수면과 이루어내는 장엄한 낙조에 일순간 묻혀 본다는 것은 우주의 한 점에 홀로 서 보는 생의 의미 있는 절차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무척 매력적인 장소이다. 나는 ‘아미산 전망대'가 인간적 의미의 시작이었기를, 그리고 철학적인 장소로 오래 남기를 희망한다. 그러면 비로소 빛나는 건축이 완성되는 것이다.     

  ‘아미산 전망대’의 위치가 절묘하다는 것은 또 다른 데에도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하구로 하구로 쫓기는 철새와 그들을 밀어내면서 도시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입장이 동시에 이해된다. 

  낙동강의 물줄기를 인위적으로 막은 하구언의 을씨년스런 모습 앞으로 근년에 세운 명지대교가 강의 상하부를 가로지르고 있다. 위는 사람의 공간이고 아래는 새의 터전인 것이다. 강의 한 편은 공단의 시설들이 공산품을 생산해 내느라 분주하다. 그것들은 푸르고 붉은 말초적인 색상의 지붕을 이고 있다. 

  이곳에 서면 그 서글픈 공존이 한편의 추상화 같이 한눈에 드는 것이다.

  슬픈 풍경이다. 전망대를 아름답게 구축하려 한 건축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거기에 건물을 구축하려 한 사실이 부끄러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위의 을숙도에 만든 ‘에코’를 표방한 시설물들이 새들이 더 아래로 옮김으로서 무용하게 되었듯이, 곧 백합도의 새들도 이 전망대에서 벗어나 더 남쪽으로 내려가리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장소가 거기에 있어야 함은 의미 있는 역설이다. 이곳은 도시가 어떤 식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생각게 하는 몇 안 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철새 무리와 인간들이 몇십 년간 대화 없이 공존해 온 현장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앞으로 땅, 물, 혹은 바다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거기에 있으므로 더욱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단 말이다. 

  사람들이 살만 하니까 길을 닦고, 자동차로 언덕에 올라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시며 새들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무성한 소문대로 온 김에 저녁놀이라도 보려는 심사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새의 먹이 짓을 살피게 된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강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진지한 표정을 살피면, ‘백합도’의 장래가 그리 어두운 것만은 아니지 싶다. ‘장 그르니에’의 말이 영원히 유효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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