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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민 Oct 19. 2021

수영사적공원, 그 푸근한 손길로

부산을 말하다

수영사적공원 푸조나무 / 그림 이종민


거리를 걷다가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만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좋은 풍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근원으로 돌아가게 한다. 말하자면 본성의 회복이다. 도시 문명은 그러한 갈망을 위하여 여러 가지 장치를 고안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도시공원이다. 그러므로 도시공원은 지친 일상에 잠시의 여유를 제공하는 단비와 같은 것이다.

내가 잠시 서보는 자리가 나무이고 물이며, 그들의 합체가 하나의 그림을 이룬다면, 그 앞에서 삶이 고되다는 푸념은 어느새 잊히고, 돌아설 즈음이면 새로운 각오 하나쯤은 새기게 되는 것이다.    

   

‘수영사적공원’이 예상치 않은 곳에 있음은 다행인가 불행인가?

이 작은 공원은 큰 숲으로 격리된 여느 잘 조성된 공원과 달리 치열하게 펼쳐지는 삶의 터전 한복판에서 소시민의 숨결과 리듬을 같이하고 있다. 아무래도 시장(팔도시장)의 사람을 닮아 수더분하다는 표현이 옳겠다. 시의 예산이 충분히 닿지 못한 탓이 더 클 테지만, 지나치게 세련된 공원으로 조성되었더라면 공원을 묘사하려는 나의 노력은 그저 세련미에 대한 공치사에 머물렀을 터이니, 그러한 수더분함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말하자면, 화장하지 않은 아낙이거나 둥근 뿔테 안경을 걸친 노인, 그렇지 않으면 실직의 고통에서 잠시 빠져나온 노총각의 운동복 차림의 어슬렁거림이 더욱 어울리는 그러한 장소이더란 것이다. 생각해보면, 삶이란 늘 그렇게 아슬아슬하고 초라한 모습의 연속이다. 구두에 광을 내고, 잘 다림질된 외출복을 차려입고 선글라스라도 걸칠 수 있는 날이 몇 날이나 될까? 그렇다면, 진정한 휴식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가 분명해진다.

거칠고 정리되지 않았다 하여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디디고 선 장소의 의미란 사람의 일생만큼이나 짙고 끈끈한 것이다.

사적史蹟이란 현재의 단어이다. 그러나 그곳에 앉아 잠시 생각하면, 그 현장이 과거에도 지금과 다름없이 치열한 현장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 치열함은 그 시대의 선비이거나, 장군이거나 어부라고 하여 다를 바가 있었을까? 또한, 군주의 시대였던 시민의 시대였던 그 중심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진실을 어찌 거스를까? 어느 하나 밑에서 밟히고 위에서 군림할 수 없이 공평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더란 말이다.


그곳, 사적 주위엔 여전히 삶의 다양한 모습이 펼쳐져 있었고, 삶이든 사적이든 마땅히 거기에 있어야만 했던 것이 민주적인 이 터의 진면목이다.     

나는 그러한 평등과 민주에 대한 열망이 꿈틀대면 팔도시장의 번잡한 거리를 거슬러 난전의 푸성귀와 어물전의 비린내를 기꺼이 맡아내며 어묵 꼬치 한 점 베어 무는 여유를 부려가며 수영사적공원의 정문을 향한다.


‘수영동곰솔나무’ (천년기념물 270호)에 붙은 늦여름 매미소리가 시장의 소란을 압도할 즈음이면 나무 아래로 어김없이 베잠방이 차림의 노인 몇몇이 눈에 들기 시작한다. 가끔 지난밤 이슬에도 불구하고 ‘푸조나무’ (천년기념물 311호) 아래를 침소로 정한 노숙자들의 무표정이 보인들 어떠리. 저나 나나 피차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곳에 매료되어 근처를 거처로 정한 시인 최영철은 “품이 넓고 부드러운 푸조나무가 할머니라면 기상이 높고 든든한 곰솔은 할아버지다.”라 말하며 이런 시를 썼다.     


잎 하나 피우는 내 등 뒤로 / 한 번은 당신 샛별로 오고 / 한번은 당신 소나기로 오고 / 그때마다 가시는 길 바라보느라 / 이렇게 많은 가지를 뻗었답니다 // 잎 하나 떨구는 발꿈치 아래 / 한번은 당신 나그네로 오고 / 한번은 당신 남의 님으로 오고 / 그때마다 아픔을 숨기려 / 이렇게 많은 옹이를 남겼답니다 // 오늘 연초록 벌레로 오신 당신 /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이렇게 많은 잎을 피웠답니다   -최영철 시 <잎-푸조나무 아래>-      


이 주변의 언덕 어디에서 군주를 향한 노래를 지어 올린 동래정씨 선비의 삶 또한 치열한 것이었다. 그 사모의 곡은 구전되어 공원 구석구석 시민의 자부심이 되어 흐르고 있으니 아무래도 이곳이 예사로운 곳은 아닐지어라.     


내님믈 그리자와 우니다니 / 산졉동새 난 이슷요이다 / 아니시며 거츠르신 아으 / 잔월효성(殘月曉星)이 아시리이다 / 넉시라도 님은 대 녀져라 아으 / 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 / 과(過)도 허믈도 천만(千萬)업소이다 / 힛마러신뎌 / 읏브뎌 아으 / 니미 나 마 니 시니잇가  /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정서(鄭敍)의 고려가요 <정과정곡(鄭瓜亭曲)>-     


조선 후기의 어부 안용복이 일본의 막부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받은 사실은 차라리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그 애국충절이 지금까지 이곳과 수영강에 도도히 흐르면서, 국제외교질서의 중요한 가늠자가 되고 있음은 이곳 사람들의 자부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꼿꼿한 정신이 부산 시민에 의하여 고스란히 배향되어 공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의미를 더하는 것은 중요무형문화재 ‘수영야류’의 터전이 이곳이란 점이다. 이 문화적인 유희만큼 시민의 생활과 의식을 풍자적으로 표현된 예가 있었을까? 그렇듯, 사적공원은 문화의 보존과 맥의 전승에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수영사적공원> 외형적 단장과 정신의 고양에 품격을 더할 이유는  외에도 충분하다. 이는 수영구민과 부산시민의 오랜 열망이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이 그리 세련되지 못함과 삶의 터전에 밀려 영역이 축소되어 소공원의 풍모에 그쳤다 하더라도 나는 불만하지 않겠다. 작위  보여주기가 아닌, 그저 시민의 곁에 어울렁 더울렁 어울려있는 터의 수더분한 모습이  어느 세련된 조원造園보다 값있는 것이라는 생각과 그러한 편안함이 진정한 도시공원의 가치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삶에 지칠 때면 소주 한잔 걸치고 공원에 들게 되는 것이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아 수백 년을 지나온 나무의 정령과 옛사람들의 혼을 고스란히 만나게 되니 어찌 위안이 되지 않을까? 그 위대한 정신들이 하나도 위압적이지 않으며, 차라리 포근하여 어머니의 손길처럼 지친 나의 어깨를 슬며시 쓰다듬어 주니 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모습의 공원을 참된 시민공원이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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