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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민 Sep 17. 2021

범어사에 가면

부산을 말하다

부산 범어사 / 그림 이종민


지하철 1호선에서 내려 느린 걸음으로 금정산에 들라. 갑남을녀의 기원이 주저리주저리 스몄던 천 년의 숲은 여전히 짙고 깊으며, 이따금 몸을 감싸는 분기탱천 무림의 기운은 또 어쩔 것인가? 고승의 목탁소리 들릴 즈음, 문득 뒤를 돌아보면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 자식 돌보듯 헤아릴 수 없는 자비로 항도의 사람들과 앞바다를 넉넉하게 품고 있더란 말이다. 척 보아도 대찰이었다.


바래고 구겨졌지만, 사진엔 금정산이 원경으로 떡 버티고 있고, 그 앞으로 대웅전과 돌계단으로 이어진 마당에 특이한 배치로 서 있는 통일신라식의 3층 석탑 옆으로 우리 네 식구가 제각각의 자세로 서 있다. 사십 대 초반인 정장 차림의 아버지와 파마머리의 어머니는 동생을 안고 있으며, 그 곁에 내가 플라스틱제 모형 배를 보물처럼 안고 엉성하게 서 있으니, 아마도 여섯 번째쯤 맞는 생일 정도가 아니었을까? 어쨌든 부모님을 추억하기에 부족함이 없을뿐더러, 언젠가부터 나의 건축이 이 지점으로부터 출발하게 되었다고 억지주장 하는 사진 한 장이 있다.


영화 ‘와호장룡’에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주윤발’과 ‘장쯔이’가 무예를 겨루던 대숲의 장면이다. DVD를 구했던 그 여름 이후로 도대체 몇 번을 더 보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용이 가물가물하니, 아무래도 나는 영화의 색과 음만 집요하게 보았음이 분명했다. 초록의 장죽(長竹)이 이루어 내는 탄성의 곡선과 흰 도포의 두 점이 섞이는 리듬에 넋이 빠져 있었으니, 그들이 펼치는 무예가 복수였는지 애정행각이었는지 그게 무어 그리 중요했을까? 나는 그때마다 오로지 범어사의 대숲을 그리곤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예의 그 가족사진이었으니, 사람을 침묵하게 하는 것 또한 영화의 힘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어떤 그리움이 물밀듯 솟구치면 범어사로 달렸다. ‘일주문’을 통과하고 ‘천왕문’을 지나 불이문에 이르면, 푸르고 높은 대숲이 하늘로 곧게 펼쳐지는데, 마치 영화에서처럼 잠시의 침묵으로 혼자만의 행복에 빠져들었으나, 마침내 그 공간이 나의 온몸을 지배해 버린 것이었다. 흥분으로 ‘보제루’를 통과하여 마당 오른편으로 돌면 대숲은 더욱 짙어지고 나는 더욱더 영화의 장면과 혼동한 것이었다.


끌리듯 우측을 돌아 마침내 너른 앞마당에 가부좌를 튼 무서운 모습의 부처와 맞닥트리면, 내가 ‘주윤발’의 무예와 범어사를 연관시킨 이유가 꼭 대숲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학동 시절 무협지에 빠져있던 청맹과니 우리에겐 이런 소문이 돌았다. 범어사에 가면 머리를 빡빡 민 도사들이 낮에는 쥐 죽은 듯 있다가 밤이 되면 모두 나타나 절 담장을 따라서 땅과 수평으로 걸어 다니고 때론 하늘을 날기도 하는데, 무서워서 눈을 똑바로 볼 수 없다더라. 중국식으로 말하여 무림의 고수들이었고, 그 소문의 ‘청련암’은 실재하고 있었으니, 범어사는 신라 문무왕(678년) 때 의상대사가 화엄 10찰의 하나로 창건한 이래로 호국의 도량이더란 말이다.


아서라. 이런 에피소드 따위를 들먹이다니.... 범어사의 공간과 역사를 이야기하기에 나의 관찰력과 식견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므로 독자를 위하여 범어사에 대하여 특별한 애정을 지닌 몇몇 건축학자들의 표현을 빌림이 옳겠다.


‘이동언 교수’는 일주문에 대하여 “정작 그림인지, 아니면 배경인지 모르게 숲과 동화되어, 일주문을 이루는 돌, 나무, 기와 그리고 숲이라는 악기들로 구성된 한 무리의 오케스트라 같다. 말하자면 건축과 자연이 상호 관입되어 혼연으로 이룬 공간이다. 마침내 일주문과 악수를 나누어 보는데, 일주문이 나를 만지는 듯하여 순식간에 하나가 된 느낌을 받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관찰이다.


내게 ‘와호장룡’을 연상시켜주던 공간에 대하여 ‘김봉렬 교수’는 "천왕문을 지나 불이문으로 이르는 길은 짧지만 길고, 굽었으되 곧아 보이는 끝도 모를 계단이 계속된다. 이 장면은 한국 불교 건축이 성취한 가장 뛰어난 모습으로 한국적 미학의 극치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2010년 화재사건으로 천왕문과 그 주변의 숲은 소실되고 말았으니, 나는 개인적인 큰 즐거움 하나를 잃은 것이다.


또한, ‘서치상 교수’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범어사 경내의 배치가 변형되거나, 조원의 구성, 루와 담의 축성법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훼손이 극을 달했다. 특히 ‘보제루’의 심각한 변형은 일제 잔재의 극치이며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범어사의 복원을 제안했다. 지금의 범어사는 부산하다. 여러 이유로 치유의 진통을 겪고있는 중이다. 화재로 소실된 천왕문이 막 복원되었으나, 천왕문으로부터 보제루에 이르기까지의 공간도 의상대사로부터 시작된 호국의 정기를 지닌 공간으로 되살아나기에 여념이 없다. 슬픔에서 잉태한 아름다움이 더 고귀한 법이다.


내게 범어사는 여전히 특별하다. 건축학도 시절, 관념 덩어리이던 공간의 정의를 이 사찰의 어느 장소에 서 봄으로서 오롯이 확인하였으니, 내 건축의 시작은 범어사에서 찍은 사진 한 장으로부터였다고 억지 인연론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삼십 년이 지나 복원의 현장을 둘러보며 간절히 빌었다. 새로이 탄생하는 범어사의 공간 또한 푸릇푸릇한 나의 후배들에게 의미 있는 하나의 장소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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