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b n Wrestle May 03. 2022

강물에 몸을 던진 후회

허황된 소망과 운의 시험에 대해

구글 검색을 하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행운을 빈다는 의미인 ‘fingers crossed’ 이미지 검색을 해보니 사람들은 검지와 중지를 꼬고 눈을 감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눈을 감는것인지는 찾지  했다.  추측으로는, 눈을 감음으로써 오롯이 행운만을 빌겠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오롯이 운에 의지하겠다는 의미.


구글에 fingers crossed 라 검색해보았다


나를 아드레날린으로 흥분시켰던 과거 기억들 중 많은 것들이 위험하거나 무모했다. 무모하고 위험했으니 짜릿했겠지만,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던 것들에겐 대가가 따른다. 16년 8월 여름 네덜란드 교환학생 시절, 내가 있던 네이메헌이라는 도시에는 Waal이라는 강이 있는데, 강의 폭은 3~400 미터 정도 된다(한강의 폭은 700 ~ 1,500 미터). 우리는 이 강가에서 수영하고 일광욕을 쬐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거기엔 한강대교 높이보다 좀 낮은 Snelbinder라는 다리가 있는데, 여기서 친구들 몇 명과 강물 속으로 다이빙을 한 경험을 소개한다. 이 경험은 죽음과 가장 가까웠던 경험이자, 객기 부리면 이렇게 죽겠구나를 느낀 사건이었다. 백 번 양보해 돌이켜봐도 정신이 나간 행동이었고, 무모하기 짝이 없어 지탄받을 일이다. 다행히 트라우마로 발전하진 않았지만, 그때의 사건은 내가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준 계기였다.


Just got lucky, that’s all


그날 약 열댓 명의 무리는 강가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었고, 그중 4명의 친구들과 브릿지 점핑을 하자고 했다. 히히덕거리며 다리 중앙 지점의 난간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난간을 넘어 강물을 바라봤을 때, 난 여기서 뛰어내릴 수 없겠다 생각했다.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뛰어들어 물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친구들이 2명 있었고, 내 뒤에 한 명은 내가 뛰어들기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은 없고, 물속에 있는 2명이 있다는 사실이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게 했다.


속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뛰어내렸다. 기억나는 건 물에 닿기까지 공중에 오래 있었던 느낌이다. 물속 깊이 들어간 후 나는 수면으로 나왔다. 위에서 보던 것보다 수면은 더 많이 넘실댔다. 먼저 들어간 친구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들에게 가려고 헤엄을 쳤지만, 물살은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내 수영 실력으로 헤엄을 치지만 친구들은 점점 멀어졌고, 난 힘이 빠지고 있었다. 조금씩 물을 먹기 시작하니 머리가 하얘지고 당황했다. 점점 몸의 중심이 어두운 물속으로 들어갈 때,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혼이 빠져 Help! Help! 를 외치다 보니 영국 친구 두 명이 어느새 내 손을 잡았다. 그들이 끌고 밀어준 덕분에 나는 가까운 뭍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살 수 있었다. 숨을 돌리고 다시 물로 돌아가는 그 친구들을 보니, 걔네들은 물안경과 오리발을 차고 있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고, 또 멍청했다.


Wishful thinking, 허황된 희망


뛰어들고 수면에 닿기까지 난 막연히 난 수영을 할 수 있다고만 생각했지, 흐르는 큰 강 속에서 수영할 실력이 있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가정은 당연히 없었다. 내가 저 강에서 수영을 해야 한다는 것에 깊은 생각 없이 지나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모르는 지형, 강, 주변 환경을 과소평가했다. 거기에 나를 위험에 빠뜨린 것은 wishful thinking, 답 없는 희망이었다.


이건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wishful thinking은 흐르는 강물에 뛰어드는 것이든, 이직이든, 연애든, 사업이든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무엇이 내 손안에 있는 사실이고 무엇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내 수영 실력을 과신한 것처럼,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길 바라는 것은 wishful thinking이다. 사실이길 바라는 무언가 때문에 나의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게 된다. 혹은 그 헛된 소망으로 인해 일련의 필수 노력들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든다. 중요한 사실(과정)들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Don’t test your luck


난 그때 운이 매우 좋았기 때문에 살았다. 운이 좋았음을 알고 나니 더 이상 내 운을 시험하고 싶지 않게 되었다. 내가 네덜란드에 있던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 공부하던 한국인 남학생이 밤에 술을 마신 후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대학 도시로 불릴 만큼 대학생들이 많이 사는 도시였고, 밤늦은 시간까지 골목골목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노는 동네다. 그럼에도 그는 실족하여 개천으로 떨어졌고, 결국 가족 품으로 오지 못 했다.


다시는 내 운을 시험하고 싶지 않다고 소망한다. Not worth the risk 다. 그 일 이후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주는 삶의 무게감은 그 당시의 짜릿함을 깡그리 덮어버리고도 남는다. 스스로 되뇌는 것은, 항상 소망하며 살되, 운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운을 바라지 않는다는 건 행운이 삶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그것이 제멋대로 뛰놀게 하지는 않겠다는 마음이다. 또는, 내가 희망을 갖는 것들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것이다. 내가 무엇에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내 스스로 내 머릿속에 가상의 시나리오와 확률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고, 그게 만약 사실에 기반한 것들이 아니라면 내가 열렬히 소망하고 노력해야 할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wishful thinking을 하고 있다면, 그걸 산산조각 내는 데는 현실 감각 한 움큼이면 충분하다.


Big words


Wishful thinking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에는 큰 단어들이 사용된다. ‘국민의 안녕’, ‘정의 수호’, ‘인간 존엄성 회복을 통한 차별 철폐 및 평등 사회 이룩’ 같은 것들이다. 또는, ‘서울에 20평짜리 아파트를 가지면 좋겠어’, ‘해외 나가서 일하고 싶어’, ‘내 아이가 똑똑하게 컸으면 좋겠어’ 등도 그럴 수 있다. 포괄적이고 큰 단어들이 많으면 단어들이 그리는 넓은 그림에 빠져 그중 무엇이 가까운 사실이고 무엇이 아닌지 모호해진다. 단어가 작을수록 그것은 wish 가 아닌 next plan이 된다. 큰 단어들이 지칭하는 것들은 멀리 있다. 너무 멀리 있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큰 단어들이 주는 가짜 편안함에 속지 않기로 다짐한다. 세상이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면 난 그 결정이 덜 무모한 것, 사실에 기반한 소망이기를 바랄 뿐이다.


Elon musk spoke on wishful thinking: “one of the biggest mistake people generally make and I’m guilty of it too is wishful thinking. You want something to be true even if it isn’t true. So you ignore things, you ignore the real truth because of what you want to be true. This is a very difficult trap to avoid. Certainly one that I find myself in having problems with. But if you just take that approach of you’re always to some degree wrong and you’re goal is to be less wrong.”


Wall in Nijmegen <volkskrant.nl>

essay by 준우

photo by Toa Heftiba, 준우

작가의 이전글 내 마음 있는 곳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