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그림
미술학원에 도착한 남자는 막막한 마음에 괜히 다시 건물 밖으로 나가 담배를 두 개비 연달아 피우고, 또 그 냄새를 지우려 가그린을 사서 열심히 가글을 하고, 호흡을 고른 후에 다시 미술학원으로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남자는 사실 미술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었다. 학창시절에 미술이라면 아주 진저리를 쳤었다. 남자는 선을 똑바로 한 번에 제대로 긋지 못했고, 자꾸만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선들과 물과 배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도화지를 흠뻑 적셔버리는 물감들 때문에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들은 얼마나 많았는지. 미술 수업이 있는 날이면 한 보따리를 이고지고 이동하는 것도 무척이나 짜증났었다. 그래서 남자는 그림을 그릴 일이 있으면 손사래를 치며 저 멀리 도망을 가버리곤 했었던 것이다.
그런 과거를 가지고 그림을 배우러 오다니. 남자는 평소에 주위에서 자신을 보고
"저거 아주 미친놈이야. 지 멋대로 살아."
라는 말을 하는 친구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자. 여기 연필을 잡아보세요."
"네."
"여기 종이를 보면 앞면과 뒷면이 있어요. 앞면은 좀 더 부드럽고, 뒷면은 까끌까끌해요. 성호 씨가 원하는 질감의 면에 그림을 그릴거에요."
"음.."
남자는 앞면을 선택했다. 선생님은 남자의 연필 쥐는 자세를 조금 수정해준 후에, 말을 이었다.
"자. 일단 선을 그어볼게요. 살짝 쥐고 그으면 흐린 선, 강하게 쥐고 그리면 굵은 선이 됩니다. 굵은 선은 지우개로 잘 지워지지 않으니 조심하시구요."
선생님은 얇은 선을 종이에 몇번 그어보았다. 얇은 선들이 서로 겹쳐셔 좀 더 짙고 어두운 색으로 변했다.
"자. 이런식으로 얇은 선으로 밝은 곳과 어두움. 명암을 표현해볼겁니다. 자. 해보세요."
"넵."
남자는 연필을 받아들고 선을 긋기 시작했다.
남자는 대략 30분간 선을 그었다. 남자가 처음에는 몰랐던 무언가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남자는 종이에 칠해진 흑연 가루들이 모여 짙은 검정을 이루고, 흑연 가루들이 흩어져 옅은 검정을 이루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손을 계속 움직였다.
"자. 잘했어요. 이제 뭔가를 그려볼텐데..."
선생님이 어디선가 책자를 가져와 그림 하나를 보여주었다.
"원기둥입니다."
말그대로 원기둥이었다. 남자는 그 그림이 매우 잘 그린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어떻게 그리나요?"
남자의 질문에 선생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보고 똑같이 그려보세요."
남자의 마음속에 다시 어린날의 과거가 떠올랐다. 삐뚤빼뚤했던 선들과 그 선들을 지켜보며 웃음을 터트리던 아이들과 얼굴이 빨개지던 남자. 남자는 연필을 쥐고 우물쭈물거리다가, 선생님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음..이렇게 못그릴 것 같아요. 저는 선도 제대로 못 긋거든요."
"음?"
선생님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의 얼굴을 살피다가, 안심을 하라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요. 잘못 그으면 지우고 다시 그리면 되죠. 그게 소묘의 매력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