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군도-솔제니찐-, 죽음의 수용소에서-프랭클-, 영화1984,미쓰백
두 권의 책과 두 편의 영화를 통해 고난/희망/자유 어쩌면 연관 없어 보이는 세 단어로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삶에 지옥보다 더 한 고난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그 지옥 속에서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그 희망을 꿈꿀 자유가 나에게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알고 있는가?
지옥이 두려운 이유는 뜨거운 불도, 어떤 형태의 통증도 아닌, 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Jacob Lee-
두 책은 세계 2차 대전 전후를 배경으로 전개되지만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른 수용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두 작가가 그 속에서 살아 남아 모든 것을 글로 남겼고 나는 운이 좋게도 그들을 오늘 만날 수 있다.
알렉산드로 이사예비치 솔제니찌의 <수용도군도>는 한국전쟁 후 한국과 비슷한 맥락의 체포와 고문, 수감이 이루어진다.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독재정권, 이런저런 혁명으로 혼란한 정국 속에 작가는 레닌과 스탈린이 통치하는 소련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공부하고 군대에 복무하다 체포된다.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권/체제 유지를 위해 잡혀 들어가고 숙청되는 분위기에 누구도 말하지 못했던 당시 소련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기록문학으로 소련의 20세기 중반의 모습에서 나는 한국의 20세기 중/후반과 너무도 흡사한 상황을 보았다.
적법한 조사도 재판도 없이, 고문으로 자백되고 만들어진 죄목을 무고한 이들에게 짧게는 8년 길게는 25년의 형벌을 내린다. 변호사도 판사도 없이 그냥 숫자를 말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형량은 달라지는 세상. 소련도, 60~80년대 대한민국도 헌법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법이 아닌 권력이 법을 다스리는 세상.
그래도 수용도 군도는 형량이 정해지고 나면 끝이라는 것이 있기라도 했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ing for Meaning: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는 독일의 유태인 학살을 배경으로 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및 비슷한 수많은 수용소에서 작가가 격은 일을 담고 있다.
수용소 안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 중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서도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의 큰 학파인 의미치료(Logotherapy) 창시의 발판이 된다. 물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이유는 운이다. 건장한 남성이었기 때문에, 수용소 노동과 관리에 필요한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선별 장교에게 선택받았기 때문에 운 좋게 종전과 함께 살아남은 사람들. 생명의 신에게 선택받아서도, 우월한 유전자를 소유해서도, 강한 육체와 정신력을 가져서도 아닌 오로지 '운'이 그들을 살아남게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운 좋은 선택을 받아서도 죽음의 신이게 '오늘은 아니여~(What do we say to the God of Death?" "Not today!"-GOT-)'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희망 즉 삶의 의미(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수면부족과 영양실조,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동물 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그들을 지탱해준 것은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의미, 진행 중이던 연구나 책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의미, 수용소에서 벗어나면 맞이할 수 있는 소소한 행복들의 의미.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니체-
니체의 한 마디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실천했던 사람들. 우리는 그 사람들을 생존자라 부르고, 현대에는 그런 사람들을 성공한 이들이라 부른다.
<미움받을 용기>로 알게 된 알프레드 아들러의 인간을 목적론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과거지향적 해석을 하던 프로이트와 다른) 참 마음에 들었는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는 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과 교육론에 놀랍도록 일치했다. 주변에 많은 이들이 삶을 부정적으로 보고, 갈길을 잃은 채 방황하며, 우울함과 슬픔에 괴로워하고 있음이 보인다. 모두들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인스타그램에 행복한 사진만 올리지만 "정말 괜찮아?"라고 진지하고 묻고 싶다. 그리고 위로해주고 싶다...
아니라고 답한다면, 지옥보다도 더 한 고통을 경험한 프랭클이 제안하는 삶의 의미를 찾는데 노력을 기울이기를 추천한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에게 극도의 고통이나 상황이 주어지면 인간은 본능에 따르는 추악한 모습을 보일 거라 주장했지만, 그는 아우슈비츠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했다.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가진 이들은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이 무너지지 않음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말한다! 삶의 의미를 찾으라고! 그리고 책에서 그 방법론을 간단히 소개해 준다.
의미를 잃은 채 싸늘한 주검으로 식어간 많은 유대인에게, 삶에 지쳐 자살을 선택하려는 현대인에게 할 수 있다면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세계 역사에서 가장 추악했던 나치와 일본제국, 그리고 그들과 다르지 않았던 많은 국가의 정권 유지를 위한 인권유린 속에서도 꿈틀거린 희망이 있었으니;
"자유를 향한 투쟁"
투쟁 없는 자유는 없고, 행동 없는 철학은 없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 가>
세계 역사의 비극에서 고난과 자유를 생각해 보았고
한국 역사로, 한국 사회의 개개인의 예시로 , 그리고 나의 삶으로 생각해본 그것 "자유(Liberty / Freedom)"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갈망하던 우리에게 또 다른 압제가 찾아왔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명목상의 민주주는 <한>을 가진 우리 민족에게 자유를 위해 투쟁하게 된 역사 이리라. 1789년 헌법이 제정되고 약간의 수정조항이 추가된 것 말곤 개헌이 없는 미국의 헌법과는 달리 1948년 제정된 한국의 헌법은 권력을 위해 악용되고 개정된 통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영화 1987에서도 전두환씨가 또 대통령을 해먹으려는 상황에서 서울대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과 연세대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시작으로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투쟁이 다루어진다.
세상에 내가 진심으로 감사하는 존재가 있다면, 나를 육체적으로 존재케 해준 내 사랑하는 부모님과 내 자아적 존재를 가능케 해준 민주열사들이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의 나로 자유를 누리지 못했음이 확실하니까!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엄청 울었다. 고등학교 때 첫 여친에게 차이고 흘린 눈물 보다도, 해병대 신병교육대에서 죽음의 주간에 어버이 은혜를 부르며 흘린 눈물보다도 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사람들이 받은 고문이나 억울한 죽음이 슬퍼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희망 때문에 기뻐서 울었다. (아~ 또 눈물 날라 하네)
어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상황에 비교할 수 있으리만은, 모든 개인의 고통은 그 당사자에겐 가장 큰 고통이라 믿는다. 어떠한 비슷한 상황도 비슷하지 않다. 그러니 어설프게 "나도 너 같은 경험을 해봐서 아는데..."라고 위로하려 하지 말자! 수용소군도에 소련의 상황과 독재정부 아래 시름하던 한국의 국민들도 각자 고통의 정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모두들 자유를 갈망했으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이 자유를 결코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영화 미쓰백은 아동학대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데, 얼마 전 소개한 일본 영화 <어떤 가족>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한민국 자살률이 그렇게 높다고 하지만 주변에 죽는 사람은 잘 없는 것 같고, 아동학대가 즐비한 것 같지만 주변에 그런 아이는 별로 보이지 않는 정부의 통계. 책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말하듯 정부 통계 보단 포털 사이트에 검색어로 보면 아동학대는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심각하다. 아이들이 그 괴로움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큰 용기 내서 경찰서를 찾아가도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현실...
그런 학대의 참상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도 자유롭게 바닷가를 볼 수 있는 자유, 따듯한 방에서 잘 자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자유, 예쁜 옷을 입을 자유, 미소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니다! 어린아이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권리를 가진 자유로운 영혼이란 말이다!
-번외-
나는 지금 따듯한 내 방에서 편한 의자에 앉아 베토벤의 교향곡 4,6,7번을 들으며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있다. 지금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수용소에 잡혀갈 일도, 가스실에서 죽을 일도, 남양동에 끌려가 고문을 받을 일도 없는 자유를 누리고 이다. 어찌 감사하지 아니한가!
지난 이스터(부활절) 연휴에 시드니 서부에 위치한 블루마운틴에 캠핑을 다녀왔다. 텐트를 처음 설치해보는 어린 여대생들을 내가 원해서 도와줬고, 처음 보는 한국인과 내가 원해서 인사하고 저녁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눴다. 또 내가 원해서 6시간 걸리는 산행을 했고, 내가 원해서 웃통을 벗고 자연을 걷고 개울물을 마셨다. 그렇게 나는 자유를 누렸다.
-마무리하며-
자유의지 자체는 보는 이에 따라 유무가 갈리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자연에서 자유를 누렸다.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막 하는 것은 온전한 자유가 아니다. 의무를 이행하고, 통제와 절제가 균형을 이룬 삶이 자유를 감사하게 느끼도록 해주더라.
많은 이들의 희생과 투쟁으로 나에겐 주어진 자유에 감사하고,
소소한 행복과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제대로(deliverately) 꾸준히(perseverance) 꿈을 이루기 위해 절제(discipline) 하는 삶.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척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