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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방학 Oct 02. 2019

장기 가족

명절이면 우리 집은 할아버지 댁에 모여 장기를 두었다. 여자들은 빼고 남자들만.  그런지 여자들은 장기를 두는  좋아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필두로, 고모부, 아버지, 사촌  동생들이 장기판에 달라붙었다. 할아버지는 그때 여든이 넘은 나이였지만, 장기를 무척  두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번도  이겼다. 할아버지는  가지 포석만 썼지만,   가지 포석을 도무지 이길  없었다. 나는 마와 상의 위치를 바꿔 보기도 하고, 포를  옆에 붙여 놓고 시작해 보기도 했지만, 이길  없었다. 할아버지는 장기의  같았다. 


 



고모부도 장기를  두었다. 고모부는 적당히  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얄짤 없었다. 평소에는 좋은  좋은 아버지였지만, 장기를 두거나 오목을 두거나 바둑을  때는 봐주는 법이 없었다. 철저하게 승부를 봤다.

 



사촌들보다는 내가   두는 편이었다. 사촌들은 장기를 나만큼 좋아하지 않았다. 아이들 항렬 중에는 내가  둔다는 사실이 나름 뿌듯했다. 나는 명절이 되면 장기판을 들고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대국 신청을 했다.


 



초등학생  장기반에 들어갔는데, 나보다  두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안경도 끼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한  이창호 같았다. 누구나 인정하는 장기반 톱이었다. 나는 학년을 마칠 때까지  친구를 이기지 못했다. 결국 그다음 해에는 장기반에 들어가지 않았다. 무슨 특별활동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나는 내가 잘하는  좋아했던  같다. 그래서 내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야를 빠져나와 다른 쪽으로 옮겨 가곤 했다. 장기가 생각만큼 안되자, 바둑으로 옮겨 갔는데, 바둑은  못했다.

 



 뒤로도 가끔 아버지와 장기나 바둑을 두긴 했지만, 예전만큼 열정이 불타오르진 않았다. 그저 시간 죽이기 용이었다. 그것도 좋긴 했지만 왠지 나는 아쉬웠다. 새로운 포석을 연구하고, 도장 깨기 하듯 어른들과 장기를 두던 그때가 그리웠다.

 



예전에 아버지는 집에서 바둑 방송을 한참 동안 보곤 했다. 나는 게임 상대조차 안되었을 테니, 아마도 아버지에게도 바둑 상대가 있었던  같다. 그게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과 그렇게 바둑을 즐겁게 두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어린아이의 눈에서  아버지였다는 , 나는 한참 뒤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즈음, 아버지는  이상 바둑 방송을 보지 않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때가 아버지의 바둑 친구가 사라진 시점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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