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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함과 선함의 다리

by 글쓰는 트레이너

착함에서 출발해 선함으로 향하는 다리가 있다.


그 다리를 건너는 일은,
본질을 생각하고 표현할 줄 아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나는 예전엔 '착한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곁에 있으면
내가 나쁜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은 “괜찮다”를 자주 말한다.


하지만 그 괜찮다는 말이
때로는 나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신호로 오해되곤 한다.


자신의 생각이 표현되지 못할 때,
관계는 종종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나는 그래서 착한 사람들을 피했다.
마치 신이 보내는 시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인지 모를 그들의 선을 넘지 않으려 늘 애썼다.

그들의 침묵을 탓했다.


어릴 적 나는
‘착하다’는 말을 듣는 게 싫었다.

착하다는 말은 마냥 순종적인 느낌이 들었고

자존심이 빠져 있어 보였다.


그래서 말 대신 표정으로 마음을 표현했고,
누가 나를 함부로 하지 않도록
무표정의 얼굴을 걸쳤다.


기쁨이 크면 슬픔도 커질까 봐
감정의 폭을 줄였다.
그렇게 방어하듯 살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의 폭이 커졌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 자랐다.

감정이 성장하며
이성도 그만큼 자라났다.

하지만 표현은
그만큼 성장하지 않았다.


여전히 침묵과 정색으로 나를 지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그 생각을 표현할 용기도 함께 자라야 했다.


사촌동생에게
"너의 생각을 잘 전달해"라고 조언했지만,
사실 나부터 잘하지 못했다.


나부터 본질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표현하지도 못했다.


이것이 나를 착한 사람,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을 만들고

상대를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착하다고 해서
이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정의 착함만으로는

선함에 다다를 수 없다.


착함은 감정의 따뜻함이고,
선함은 분별이 깃든 따뜻함이다.


선함은 옳음을 향하지만

그 옳음은 차가운 판단이 아니다.
따뜻함이 이성을 만나
지각 있게 머무는 태도다.


이제야 조금은 알겠다.

선하다는 말이 더 깊은 책임을 가진다는 것을.

선한 사람은 그 따뜻함으로
세상을 바르게 이끈다.


착함에 머무르지 않고
선함으로 가는 길로 나아가 한다.


감정의 따뜻함에
이성의 분별을 더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우고 싶은 '표현의 용기'다.


그 용기가
나를, 그리고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고 바르게 만들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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