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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를 보던 나, 지금의 나

by 글쓰는 트레이너

나는 존재감의 구멍이 숭숭 뚫려있었다.

집안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도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라고 알고 있었지만

조직에서는 어떤 역할을 해야만 존재가 선다고 믿었다.

그래서 늘 '무언가 기여해야 한다'는 조급함을 품고 있었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데도

나 혼자 그 보이지 않는 기대에 맞추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전전긍긍하고, 눈치를 보곤 했다.


최근 워홀로 갓 온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예전의 내가 그의 모습에 겹쳐 보였다.
그때의 나는 늘 역할이 먼저였고, 존재는 뒤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디에 있든
그냥 '나라는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는 감각을 갖고 있다.
누구든 각자 소중한 존재이고,
내가 소중하기에 타인도 소중하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존재와 역할은 다르다.
존재가 먼저 자리를 잡으면
역할은 훨씬 명확하게 보인다.
역할은 때로 주어지는 것이고,
그 역할이 주어진 데는 이유가 있다.


그저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일.
이 단순한 사실을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그동안 나는
주어지지 않은 역할까지 찾아 하려는 습성이 강했다.
내 능력보다 높은 역할을 원했고,
그 욕심이 나에게는 작은 자만이 되었다.


지금은 다르다.
내 존재를 믿는 사람이
오히려 겸손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존재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으면
지금의 위치, 능력, 역할로 인해
자존이 다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존재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현재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지금의 실력이 아직 별것이 아니어도 괜찮다.
존재는 그와 별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장의 출발선에서
부족한 점을 차근히 파악하고
뿌리부터 단단히 자라 갈 수 있다.
뿌리가 깊으면 흔들려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누가 비난을 하든, 눈치를 주든
존재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도 같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타인의 말이 '멍멍이 소리'인지,

아니면 배울 점이 담긴 '진심의 말'인지 분별할 수 있다.
받아들여야 할 말은 담담히 받아들이고
흘려보낼 말은 가볍게 흘린다.


나를 믿어보니 비로소 보였다.
내가 아는 것도 있지만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이 모름을 견디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모르는 것이 많을수록
앞으로 배울 것이 많다는 기쁨을 안다.
배움이 주는 성장은 조용하지만 강력하다.


최근 대화를 나눈 그분이 물었다.

"근데, 눈치를 주는 사람이 나쁜 거 아니에요?"

그 질문을 들었을 때
내가 가장 많이 달라진 지점이 또렷해졌다.


누가 눈치를 주든,
누가 나를 흔들든,
그 환경이 나를 결정하지 못하도록
내 정신을 키워야 한다는 것.

이제는 그 사실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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