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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by 글쓰는 트레이너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은 날,

엄마는 예정된 여행을 취소했고
나 역시 마음 한편에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괴롭지만 않으셨으면 좋겠어."
그 말을 전할 때, 사실은 더 깊은 바람을 품고 있었다.
고통 없이 눈을 감고 영생을 사시는 편이
할머니에게 더 평안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이었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는 늘 '아팠던 날들'이 있었다


할머니는 만날 때마다 가장 힘들었던 과거를 꺼내셨다.

다산 다난했던 시집살이 이야기,
엄격했던 시어머니 이야기,
먹는 것마저 눈치 보이던 소식하는 집안 이야기.

그 서러운 기억들은 마치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는 그림자처럼 늘 반복되었다.


할머니는 우울증 진단을 받으셨고
최근, 7개월 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라는 말을 여러 번 되뇌셨다.

몸을 가누는 것도 힘들고,

외출은 두렵고, 무엇을 먹는 것도, 만드는 것도 버겁다고 하셨다.

손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드리고, 손을 꼭 잡아드리는 일.
"보고 싶어서 왔다"라고 말해드리는 정도 뿐이었다.



그래도 할머니의 사랑은.. 언제나 같았다


힘들어 슈퍼마켓 가는 것도 어려우셨던 할머니는
손주가 왔다고 과일이며 과자며
자꾸만 당신의 것을 내어주셨다.

그게 할머니식 사랑이었다.


어렸을 땐 다이어트 중인데 자꾸 먹이는 할머니가 불편했었던 내가, 먹지 않을 간식들은 "나중에 먹을게요"라며 주머니에 챙겨가는 것을 택했다.

"할머니, 자꾸 먹이니까 살쪘어요!"라며 할머니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했었는데 조금 컸다고 그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보다 조금 더 자란 나이가 되어서 그런가 사랑이 보였다.



떠올리니 아린다


쓰러졌다는 소식에 "괜찮으실 거야, 이겨내실 거야."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기대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다른 기능은 거의 하지 않는데 살아 숨쉬시기만 바라는 마음이 어쩌면 더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프고 괴로운 삶을 이어가는 거라고 생각해서 그럴까.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누가 보면 나쁜 손녀일 수 있겠다.


막상 앞으로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이 저리고 아린다.


소식을 듣고 가까운 성당으로 향했다.
직접 부탁드리면 할머니가 더 좋은 곳으로 가실까 하는 마음이었다.

평소 하지 않던 기부도 했다.
기부하면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실까 하는
아이 같은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글로 적고 보니 알겠다.

기도의 방향이 좀 어긋나 있었다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주실 거라 믿고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렸어야 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슬픈 건 어쩔 수 없다.

슬픈 건 슬픈 대로 내 감정을 느끼되 너무 빠지지만 않아본다. 살 사람은 살아야 되니까.


그래서 할머니와의 추억을 꺼내보며 글로 애도하고 싶었다.

고등학교가 집과 멀어
한 달간 할머니 댁에서 지냈던 시절.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흰자가 덜 익은 계란을 해주시던 할머니, 저녁 공부할 때는 김맛 옛날과자를 내어주시던 할머니.

푸짐한 아침과 야밤의 간식까지 챙겨주시는 바람에
살이 쪘다고 투정했던 사춘기 시절의 나.

할머니도 그날 꽤 놀라셨던지
나는 한 달 만에 다시 집에서 멀리 등하교를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은 내 마음속에 아주 깊게 남아 있다.

하지만 생전의 할머니는

그 시기를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하셨다.

가까운 기억은 희미해지고
6.25 시절의 굶주림과 시집살이의 서러움만이
평생을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할머니는 내 안에 살아 있다.


할머니의 존재감과 사랑은
내 가슴속에 언제나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할머니를 기억하는 한,
할머니는 여전히 이 세상에 함께 계신다.




To.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표 갈비찜이 먹고 싶어요.

토란국, 영양찰밥도 갑자기 생각나네.

아, 할머니표 빨간 건새우강정 너무 맛있는데.

할머니한테 레시피 맨날 물어보고 까먹고 물어보고 반복했는데 또 까먹었어요.

할머니 떠올리면서 한번 맛 찾아볼래요.


옛날엔 운동하는 사람은 무식하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운동하는 사람은 대단한 거였더라고

운동하는 사람은 항상 잘 먹어야 한다고 얘기해 주셔서도 감사해요.


나는 할머니가 이런 이야기해 주실 때마다

날 지지해 주신다고 느꼈어요.


손녀, 할머니 사랑 듬뿍 받고 잘 자랐다고

그리고 나도 할머니를 많이 사랑한다고

다른 건 모르더라도 이건 꼭 알아주세요.


나도 착실히 잘 살다가 갈게요.

나중에 만나요.

타지에 있다고 마중 나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사랑해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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