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 마지막 날, 아빠와 딸은 각자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법으로 아침을 맞이한다. 간밤에 배탈에 시달리느라 두 시간도 채 자지 못했다. 그래도 새벽에 약을 먹은 후 요동치던 고통이 한결 나아졌다. 창문 너머 작은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엔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트레킹 내내 본 설산은 오늘따라 밀가루가 뿌려진 호밀빵같이 거친 바위 표면 위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방 한쪽을 커다랗게 차지한 창문 덕분에 액자 속 명화를 감상하듯 가만히 누워서 눈만 깜박인다.
밤을 보낸 오스트레일리안 캠프에서 히말라야 트레킹의 종착지인 포카라로 가기 위해서는 차가 올 수 있는 마을까지 걸어 내려가야 한다. 우리는 차를 적게 타고 조금 더 걷는 1,130m의 페디를 선택했다. 둥근 챙이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퀭한 표정과 짙은 다크서클, 핏기 없는 입술로 발걸음을 옮긴다.
트레킹에 사용되는 길은 예전부터 네팔 현지인들이 사용하던 경우가 대다수다. 마을 어귀를 걸을 때마다 그들의 삶이 강하게 느껴진다. 도로 구석에 세워진 낡은 트럭 한 대는 얼핏 보아도 오래된 연식에 비포장도로를 다니느라 외관도 성한 곳이 없다. 저 차의 주인은 얼마나 오랫동안 울퉁불퉁한 산길을 운전했을까? 도로에서 사람만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좁은 오솔길로 들어서면, 오밀조밀 들어선 집 사이로 나지막한 돌담이 길게 쌓여 있다. 마을의 골목골목을 누비고 그들이 머무를 벤치에서 똑같이 쉬어 간다. 마을을 넘어서 한동안은 경사면을 깎아 만든 계단식 논밭 사이를 걷는다. 겨울이라서 마른 풀이 무성했지만, 산을 깎고 씨를 뿌리고 작물을 일궈내는 삶을 짐작할 수 있다.
페디로 가는 마지막 관문은 트레킹 내내 우릴 괴롭히던 경사 높은 계단이다. 중턱을 지나자 건물이 하나 세워져 있다.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열린 문틈으로 살펴보니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다. 네팔에는 여러 민족이 모인 국가라서 기념일이 많다. 그날 역시 종교와 관련된 기념일이라고 가이드가 말한다.
잠시 후 계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붉은 옷의 여인들을 마주친다. 할머니부터 젊은 여성까지 연령도 다양하다. 그들도 중간에 쉬는 걸 보면 트레커나 산 곁에 사는 네팔 주민들이나 계단이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묘한 동질감이 든다. 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들과 시선이 닿았고 서로에게 옅은 미소를 짓는다.
계단을 내려와 준비된 차를 타고 포카라로 향한다. 지나치는 풍경의 속도가 너무 빨라 생소하다. 바퀴와 흙길이 거센 마찰을 일으켜 날리던 먼지 대신 바닥이 매끄러운 널찍한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길옆으로 색을 알록달록하게 칠한 단독주택과 가게가 잔상처럼 스친다. 네팔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인 오토바이가 곳곳에서 경적을 울리고, 오토바이 한 대에 4인 가족이 옹기종기 탄 이색적인 광경이 연출된다. 낯익은 거리에 들어서자 반가움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 매일 낯선 곳에 도착해 밤을 보내고 다시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나던 우리가 익숙한 포카라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속세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늦은 점심으로 가이드, 포터와 근처 한식당에 갔다. 음식이 나오기 전부터 기대에 차서 아빠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네팔 현지인이 만드는 한식 치고는 밑반찬으로 나온 김치부터 제법 그럴싸하다. 아빠는 뜨끈하고 얼큰한 김치찌개 국물을 떠먹고 소리 내서 웃음을 터뜨린다. 산행의 마무리를 자축하는 식사에 술이 빠질 수 없다. 아빠는 한국 소주 한 병을 주문한다. 트레킹을 끝내고 마시는 술은 더 달콤한 듯 싱글벙글하다. 식사 후 계산서를 받은 딸이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그거 술 얼마인지 알아요?”
“얼마인데?”
“2,000루피. 거의 20,000원?
“진짜로? 그렇게 비싸? 이야.”
20,000원짜리 소주는 충격적이지만, 약간의 사치도 용서되는 마지막 날이다. 하룻밤 머무를 호텔도 지금까지 숙소 중 가장 호사스럽다. 방은 휴양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에메랄드색과 흰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인테리어와 라탄 소재의 소품이 사용되었다. 침대는 굴러다녀도 떨어질 걱정 없이 큰 퀸사이즈이고 몸을 던져 누워도 미동 없이 푹신푹신하다. 작은 책상 위엔 웰컴 과일인 바나나와 네팔의 고급 차가 놓여 있다. 씻으러 들어간 화장실은 감동의 연속이다. 샤워기를 타고 콸콸 쏟아지는 뜨거운 물과 반신욕을 할 수 있는 욕조에 입꼬리가 찢어지게 웃는다. 트레킹 동안 쌓인 피로마저 씻기는 듯하다.
본격적으로 관광객답게 쇼핑을 한다. 출발 전엔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도 짐을 늘리기 싫어서 사지 못했다. 찜한 물건을 찾아서 거리를 누빈다. 가장 사고 싶었던 물건은 오색 실로 만든 수공예 가방이다. 사회적 기업에서 운영되는 가게로, 금액의 일부는 네팔 여성의 교육 지원에 사용된다. 친구들에게 선물할 작은 파우치와 팔찌도 고른다. 아빠는 거래처 직원들과 친척들에게 줄 선물을 살핀다. 네팔 고산지대에서 생산된 차를 파는 가게엔 다양한 가격과 종류를 선택할 수 있다. 찻잎의 향기도 맡아보고 포장도 꼼꼼하게 본 아빠는 예쁜 꽃문양이 조각된 나무 상자를 산다. 잡다한 기념품과 가이드북을 판매하는 서점을 들어가서 히말라야 산맥이 그려진 네팔 달력을 집어 들고, 자수 티셔츠를 파는 가게에서 아빠와 초록색에 산맥이 새겨진 커플티도 골랐다.
오늘 밤만큼은 트레킹에 대한 감정과 생각은 잠시 끈다. 대자연 속의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나 사람과 길에서 깨달은 배움도 묻어둔다. 최선을 다해 끝까지 걸은 우리에겐 포근하고 편안한 밤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 자신의 자리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하루를 보낸 누구나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