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 전 아빠와 딸 사이의 골칫거리는 '짐'이었다. 처음으로 포터(트레킹에서 짐을 대신 들어주는 직업)와 함께 등산했기 때문이다. 책과 인터넷 글에서는 가방 무게로 15kg에서 20kg 사이가 적당하다는데 막상 짐을 챙기려니 어려웠다. 네팔 트레킹에서 안전상의 이유로 포터를 고용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짐이 부담스러웠다.
트레킹을 끝낸 후 생각이 바뀌었다. 아빠와 함께 할 때 가이드와 포터는 반드시 필요하다. 가이드는 트레킹의 지휘자다. 일어난 순간부터 자기 전까지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이 되도록 돕는다. 우리가 걸은 코스는 방향 표지판이 적었고, 산이 워낙 높아서 휴대전화로 정확한 위치를 찾는 건 불가능하게 보였다. 쉬는 날 없이 산에 오르는 가이드도 한국인이 자주 걷는 길이 아닌 탓에 현지인들에게 길을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가이드는 경치가 훌륭한 숙소, 안전하게 걷는 방법, 롯지에서 식사 주문하기 등 수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개인적으로 함께 한 가이드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능숙한 한국어 실력이었다. 한국에서 약 5년간 일한 경험이 있어서 한국 언어와 문화에 익숙했다. 덕분에 영어로 대화하기 어려웠던 아빠의 든든한 말동무가 되었다. 그동안 참았던 한국어를 원 없이 사용해서 히말라야 트레킹의 궁금증을 해결했다.
“큰 아빠 갔던 곳 있잖아. ABC 트레킹. 거기보다 여기가 높이는 낮아도 계단도 많고 더 힘든 코스래.”
“우리가 만약에 온천을 갔으면, 저기 산 중턱까지 갔어야 했대. 어휴, 엄청 멀어.”
“우리 둘은 그래도 잘 걷는 편 이래.”
산은 항상 변수가 많이 생기는 장소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위험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가이드와 함께 걸어서 걱정이나 부담감을 내려놓고 아빠와의 추억 쌓기에 집중했다.
함께 있는 예쁜 사진도 찍어주셨어요
아빠와 가이드
포터인 샤전은 동갑내기 친구였다. 처음 여행사에서 만났을 때, 앳된 얼굴과 호리호리한 체격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첫인상은 무거운 짐을 들고 무사히 걸을 수 있을지 걱정할 정도였다. 첫날 내내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끔 가이드와 네팔어로 대화를 나눴지만, 대체로 묵묵하게 걷기만 했다. 도착지인 울레리 입구에서 다른 사람들을 따라 계속 걷고 있을 때였다. 가이드는 지친 아빠를 챙기느라 멀찌감치 뒤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샤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저기…. 여기서… 기다리면 안 될까?”
“네. 어? 엥? 한국어 할 줄 알아요?”
“조금…. 할 줄 알아요.”
한국으로 일하러 가고 싶어서 잠시 한국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반가움에 몇 마디 더 건네니 듣기는 얼추 하는데 말하기를 어려워했다. 그때마다 본인도 답답해서 미간을 찡그린 채 순박하게 웃었다. 또래여서 대화를 나누는 게 재밌었다. 그는 걷는 모양새가 조금 엉성했는데, 포터로서 세 번째 산행이었다. 그래도 등산화를 신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회색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씩씩하게 산을 누비는 모습은 기가 막힐 만큼 대단했다. 산행이 막바지에 다다르던 5일 차에 포터가 뒤를 돌아 눈을 마주치더니 물었다.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가고 싶으냐고요? 아니요. 괜찮아요.”
장난 삼아 투정 부리며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한 번이 아니라 그날따라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했다. 살짝 억울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 그 정도로 집에 가고 싶다고 안 했어요. 집에 가고 싶다고 몇 번 안 했는데?”
“네? 쉬고 싶어요?”
“아, 쉬고 싶으냐고요? 아니요. 계속 가요.”
착각이었다. ‘집에 가고 싶어요?’와 ‘쉬고 싶어요?’의 발음이 비슷해서 헷갈렸다. 샤전은 여전히 오해가 생긴 줄도 모르겠지만, 힘들까 봐 신경 쓰는 예쁜 마음이 고마웠다.
딸과 포터
네팔에서 아빠와 자주 하던 말이 있다.
“우리 참 좋은 가이드랑 포터를 만난 것 같아요.”
세상은 좁고 사람의 인연은 언제 어디서 이어질지 모를 일이다. 이번 트레킹에서 처음 만난 포터와 가이드가 서로 먼 친척이라는 아침 드라마 같은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으니까. 새로운 만남은 직접 부딪히기 전까지는 결말을 알 수 없다. 낯선 곳으로 떠나온 여행자라면 지레 걱정하고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