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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e Oct 24. 2024

가까운 구석기

Schumann Sonata No.2, Op.22 mov.1

월요일 출근길 문득 버스 밖으로 보이는 작은 공원이 낯설고 같이 달리고 있는 차량들이 어색했다. 건물로부터 지하철역으로부터 이정표로부터 미시감을 느꼈다. 커다란 게임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는 세상이다.

나는 하다못해 이 버스의 손잡이 하나도, 위급 시 유리창을 깰 때 쓰는 망치 하나도 혼자 힘으로 만들 수가 없는 인간인데 날 때부터 환경이 이렇게 만들어져 있었기에 누리며 살아간다.

구석기 신석기는 까마득한 옛날이 아닌 알몸으로 떨궈진 낯선 땅이면 될 거다. 가진 것 없이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바로 그곳이 나의 구석기다.

날짜를 세어 나가기 위해 널찍한 돌판에 작은 자갈로 숫자를 새기다 보면 연필이 간절해지는데 이 가장 단순한 필기구조차 만들어 내려면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볼펜, 삼색볼펜, 형광펜, 유성매직, 만들고 싶은 것의 복잡성이 커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필요하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도움을 구하고 사회를 이루는 무수한 과정이 지금 세상을 만든 것일까, 지금 이 무서운 발전 속도의 원동력은 더 많은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해 지구촌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낸 과연 3차 산업혁명이었구나 싶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만들 수 없는 것을 쉽게 입고 내가 구할 수 없는 재료로 만든 것을 쉽게 먹고 듣도 보도 못한 물질들로 지은 집에서 잠을 자고, 인류가 까마득히 오랫동안 이 땅에 살았다는데 단 몇 백 년 만에 이런 세상을 이뤘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누가 나라는 캐릭터로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가능해져 가고 모든 것이 쉬워져 가는 하나의 설정으로.

풍요로운 현대사회에서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인간이 돈을 수단으로 자급자족 흉내를 낼 수 있는 무수한 재화와 시스템이 두렵고 생소했던 아침 생각 끝에는 약간 하얗게 질렸다. 구석기에서 온 얼빠진 얼굴과는 대조적인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버스 벨을 눌러 쨍하니 울리는 소리로 내려달라는 말을 대신하고 자동으로 문이 열린 버스에서 내려 보도블록을 밟고 하얀 줄이 그어진 횡단보도 앞에서 초록 불이 켜지자 줄 맞추어 멈춰 선 자동차들 앞으로 길을 건너고 투명하게 안이 보이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위쪽으로 향한다는 표시의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에 타 땅으로부터 무려 23층, 내 회사에 도착했다.



Schumann Sonata No.2, Op.22 mo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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