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zart Piano Sonata No. 16, K. 545 mov.2
2014년 겨울, 내 친구 박혜진은 고흥 본가에 가던 길에 낚시터에서 유기견 한 마리를 만났다.
호떡 한 조각을 건네고 떠나려는데, 강아지는 작은 몸으로 악착같이 차를 쫓기 시작했다.
가엾기도 하고 본가에 마당도 있고 개도 기르시니, 데려가서 '땅꼬마'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밥을 허겁지겁 먹고 배가 볼록한 것을 보고 오랜 길거리 생활 탓에 식탐이 많구나 싶어 더욱 보살폈는데,
알고 보니 땅꼬마는 임신 중이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다.
단 한 번의 친절을 놓치지 않은 건 안전한 곳에서 출산하려는 어미의 본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새끼들을 동네에 한 마리씩 나누어 줄 거라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강아지 강아지 노래를 부르던 나에게 온 행운, 땅꼬마의 막내딸은 우리 집 막내가 되었다.
우리 가족이 되어 함께 언제나 기쁘기만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희동'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고흥에서 돌아온 친구 집에 가서 희동이를 스티로폼 박스에 넣어 데려오던 날,
이 손바닥만 한 생명체가 과연 안 죽고 살까, 이 털가죽 속에 장기가 다 들어있긴 한 걸까, 아직 살아있을까 싶어 버스에서 상자를 자꾸 열어봤다.
집에 온 지 하루이틀은 우는 소리를 자주 냈다.
아직 먹고 싸고 잘 줄밖에 모르는 어린 생명이 온 힘을 다 해 어미를 찾고 있었다. 그 당황스러운 눈동자에 여러 번 “미안해, 이젠 내가 네 가족이야” 말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앓은 희동이는 다행히 금세 적응했다.
물에 불린 사료를 주면 밥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꼬리를 살랑대며 먹고, 똬리를 틀 듯 몸을 말고 자는 건 어디서 배웠는지 신기했다. 통통통 움직이는 작은 걸음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났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배변 패드에 용변을 해결하는 게 신통했다. 친구들은 번갈아 가며 새로 태어난 공주를 알현하듯이 찾아와 끙끙 앓는 소리를 하고 갔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희동이는 곧잘 깡충거리기도 하고 처음 나간 산책길에서는 제 몸보다 커다란 낙엽을 물고 와서 큰 웃음을 주기도 했다. 슬리퍼나 아빠 시계 같은 것이 없어져서 보면 희동이 집 안에 있기도 했고, 내가 울고 있으면 조용히 다가와 눈물을 핥아 주기도 했다.
희동이의 모든 첫 경험은 나의 첫 경험이기도 했다. 예민한 내가 희동이를 위해 감수하는 불편에는 너그러웠다. 밤에는 혹시라도 내 팔에 깔릴까 선잠을 자고, 아픈 기색이 보이면 담요에 여러 겹으로 싸서 병원에 달려가곤 했다. 내리사랑이란 걸 처음으로 해 봤다.
희동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길에서 마주치는 생명에게도 자연스레 마음이 가 닿았다.
나이 들어 걸음이 느린 개, 볕 좋은 데서 목을 쑥 집어넣고 졸고 있는 비둘기들, 풀숲을 들썩이며 포르르 거리는 참새들, 작은 틈을 미끄러지듯 드나드는 고양이, 비 오는 날 나왔다가 길 잃은 지렁이, 숨 쉬는 것들, 움직이는 그림자를 지닌 이들,…
양손 위에 올라오던 작은 아이는 이제 양팔로 안으면 묵직할 만큼 자라, 어느덧 열 번째 생일잔치를 앞둔 어르신이 되었다.
'다운 독' 자세로 기지개를 켜고 방에서 나와 차박차박한 걸음 소리로 방마다 기웃거리며 가족들이 다 있는지 살핀다. 아침 볕이 잘 드는 소파 한켠에서 졸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챱챱 물을 먹는다. 밥에 고기를 섞어주면 고기만 골라 먹고 남은 사료는 나중에 아쉬운 대로 먹는다. 하루에 두세 번은 산책을 간다. 매번 세상에 처음 나온 아이처럼 곳곳에 밴 냄새를 정성스럽게 들이쉰다. 아빠 말로는 동네 개들이 남긴 '카톡'을 확인하는 일이 얼마나 재밌겠냐고... 나무 밑동마다 모퉁이 구석마다 웬만큼 답장을 하고 명당자리를 한참 찾고서야 응가를 하고 나면 이만 집에 가자 한다. 발을 씻고 말려주면 조용히 머리를 기대고 늘어진다.
저녁이 깊어가는 어느 순간 눈빛이 변하는데, 마지막 귀가는 아빠다. 현관이 열리기도 전에 꼬리가 떨어질 듯 움직인다. 뒷발로 연신 뜀박질하고 양 귀를 뒤로 젖히고 안방과 거실 사이를 내달리는 눈이 형형하다. 우리의 12시간이 개에게는 12년일까 싶은 세리머니까지 마치고 나면 하루 일과 끝.
기울어진 햇빛 아래 까만 돼지 같은 그림자와 함께 걸을 때, 입을 벌리고 있어서 쌀알 같은 아랫니가 보일 때, 추울까 덮어준 담요를 떼어낼 줄 몰라서 등에 덮은 채로 어기적어기적 돌아다닐 때, 하늘을 향해 동그란 입모양으로 "아우우" 하울링 할 때, 가족을 지키느라 짖을 때, 산책을 과하게 하고선 코를 골며 세상모르고 잘 때.
매 순간 쌓이는 소중함, 그 뒤로는 두려움과 슬픔이 등비수열 곡선으로 커진다. 급히 달려가 만지며 이마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으면 그 의아한 표정이란.
희동이에게는 오직 지금 이 순간 뿐, 그 심플하고 진실된 삶이 존경스러워 '희동 선생'이라 존대하기도 한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친구가 그랬다. 나를 세상의 전부라 여기는 꼬마가 생겼다고.
이게 내가 사는 이유가 되었다고.
여태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나를 위해, 희동이가 먼저 와 줬나 보다.
순수한 마음과 통할 때, 의심 없이 사랑을 말할 수 있다.
희동, 이름 그대로의 기쁨.
우리를 세상이라 여기며, 결국 우리의 세상이 된 아이.